제2차 세계대전 동안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주고받은 편지는 2000여 통에 이른다. 고립주의를 고수하며 개입을 주저하던 루스벨트가 결국 영국에 대한 원조와 참전을 결정한 데는 처칠의 집요한 편지외교가 톡톡히 한몫했다. 처칠의 편지는 대부분 루스벨트를 구슬리고 애원하는 일방적 구애였지만 결정적 순간엔 “미국이 원조하지 않으면 영국은 독일에 항복하게 될 것”이라는 은근한 협박도 마다하지 않았다.
▷밥 우드워드의 신작 ‘격노(Rage)’ 출간을 앞두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주고받은 27통의 서신이 일부 공개됐다. 김정은의 편지는 손이 오그라드는 표현이 가득하다. “우리가 나눈 매 순간순간이 소중한 추억이다. 특별한 우정이 마법의 힘으로 작용할 것”이라며 재차 만남을 요청했다. 트럼프도 화답했다. 둘의 사진이 실린 신문 1면을 동봉하고 이틀 뒤 회동 사진 22장을 또 보내며 “우리의 독특한 우정을 담았다”고 썼다.
▷김정은은 ‘밀당(밀고 당기기)’도 적절히 구사했다. 작년 판문점 회동 이후 한미 군사훈련이 완전히 중단되지 않은 것에는 불쾌한 심정을 드러냈다. “나는 분명히 기분이 상했고 이 감정을 숨기고 싶지 않다.” 그러면서도 “이런 솔직한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는 우정이 자랑스럽고 영광스럽다”며 트럼프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았다. 우드워드는 이를 ‘실망한 애인의 어조’라고 묘사했다.
▷트럼프는 며칠 전 트위터에서 “존 볼턴(전 국가안보보좌관)은 내가 그걸 정말 연애편지로 여겼다고 한다는데, 그건 비꼬는 것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볼턴의 회고록에 따르면, 트럼프는 그 편지에 정말 반색했다. 편지를 보자마자 “김정은을 백악관으로 초청해야겠다”고 말해 측근들을 기겁하게 하는가 하면 “나에 대해 뭐라고 썼는지 들어봐라”며 자랑스레 읽기도 했다. 볼턴이 “쥐똥만 한 나라 독재자의 편지”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그러니 참모들은 그 편지가 트럼프의 어디를 긁어줘야 하는지 정확히 아는 파블로프식 전문가의 솜씨라며 혀만 찰 수밖에 없었다.
▷김여정은 두 달 전 이례적인 담화를 냈다. 김정은의 허락을 받았다며 “미국 독립절 기념행사 DVD를 꼭 얻으려 한다”고 했다. 끊긴 정상 간 소통을 복원해 보자는 기대였을 것이고, 그 사이 은밀한 편지가 오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트럼프는 “나는 상대가 거칠고 비열할수록 잘 지낸다”며 독재자를 잘 다룬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정은과의 기이한 브로맨스는 틀어지면 엄청난 위험을 낳을 수 있다. 연애의 끝이 결별을 넘어 원수지간이 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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