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起)] “다리가 예쁘세요.” 정형외과에서 물리치료를 받던 69세 할머니는 이런 느물느물한 말을 들어요. 스물아홉 살짜리 간호조무사 청년으로부터요. 그리고 할머니는 청년에게 강간당해요. 고민 끝에 할머니는 동거 중인 할아버지에게 피해 사실을 털어놓고는 경찰에 신고해요. 하지만 담당 형사는 “(청년의) 친절이 과했네”라고 비아냥대며 쉽게 믿어주질 않아요. 일흔 가까운 나이에 동거를 하는 할머니를 세상은 주책바가지로 바라볼 뿐이죠.
청년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돼요. 늙은 여자를 젊은 남자가 탐했을 리 없다나요. 할머니는 청년의 정액이 묻은 자기 속옷을 경찰에 증거로 제출하고, 청년은 이때부터 “합의하에 한 일”이라고 터진 입으로 주장해요. “할머니와는 이미 동네 슈퍼에서 여러 번 마주쳤고 정감 어린 인사말까지 주고받는 사이”라면서요. 할머니는 하필 치매 초기예요. 청년과는 과거에 마주쳤는지조차 가물가물해요. 내가 그놈을 아나? 모르나?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상실해가는 할머니는 결혼을 앞둔 이 청년의 예비 신부가 만삭이란 사실을 알고선 죄책감마저 품지요. 늙은이가 괜히 젊은이 앞길만 망치는 건 아닌가. 결국 할머니는 동거 중인 할아버지의 집을 떠나 어딘가로 사라져버려요….
어때요? 얼마 전 제가 본 한국 영화 ‘69세’의 내용이에요. 마지막엔 할머니의 가슴 먹먹한 내레이션도 나와요. “제 이야기가 여러분을 불쾌하게 만들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용기를 내는 건 제가 아직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살아 있는 모든 것엔 사연이 있어요. 사람들에게 짓밟히면 밟힐수록 고개를 쳐들고 자라나는 한낱 질경이에게도 사연은 있다고요. 겨우 몇 개 극장에서 개봉한 독립영화지만 이 영화는 마음을 강렬하게 잡아당겨요. 예순아홉 살 할머니이기 전에 여자로, 인간으로, 생명으로 인정받고 싶은 주인공의 절실한 마음이 그런 마술을 부리지요.
[승(承)] 맞아요. 영화를 움직이는 힘은 사연이에요. 선한 사연도 악한 사연도 아닌, 절실한 사연요. 바로 이런 이유로, 요즘 흥행 1위를 달리는 할리우드 대작 ‘테넷’은 매우 매우 매우 매우 매우 매우 실망스러워요. ‘시간’을 탐구해 온 스타 감독 크리스토퍼 놀런의 신작인 이 작품의 줄거리는 이렇게 요약된다고 하네요. ‘제3차 세계대전을 막기 위해 미래의 공격에 맞서 현재 진행 중인 과거를 바꾸는 이야기.’ 아, 듣는 순간부터 짜증 제대로 나요. 미래의 공격에 맞서 현재 진행 중인 과거를 바꾼다고요? 뭔 말이에요? 검정에 맞서 회색인 흰색을 바꾼다고요? 미래 반달곰에 맞서 현재 호랑이인 과거 얼룩말을 바꾼다고요? 미래 이혼에 맞서 현재 결혼 중인 과거 연애를 바꾼다고요? 와우!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차라리 스크린을 찢어버리고 싶어요. 시간을 거스르는 기술 덕분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현재에서 만나요. 한 놈은 앞으로 뛰면서 현재의 시간 속에서 공격하고, 동시에 미래에서 온 조력자는 시간을 거슬러 뒷걸음질로 뛰면서 협공을 펼치지요(말만 들어도 돌아버릴 것 같아요).
[전(轉)] 제가 테넷에 실망한 이유는 엔트로피니 뭐니 하는 물리 이론 때문이 아니에요. 복잡하기 짝이 없는 이런 짓거리들을 주인공이 펼치는 절실한 이유가 정작 영화엔 부족해서예요. 놀런 감독의 전작인 ‘인터스텔라’나 ‘인셉션’에도 꽤 어려운 시간 개념이 등장하지만, 우리는 물리 이론 자체가 아니라 자기 안의 지옥과 싸우려 시간의 차원을 뛰어넘는 주인공들의 간절함에 감동 먹었던 거라고요. 테넷이 지식의 향연이라고요? 그럼 극장엘 가지 말고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읽으세요. 제작비로 수천억 원을 쏟아부었다느니, 리얼리티를 중시하는 감독이 컴퓨터 그래픽을 쓰지 않고 보잉747 항공기를 실제로 때려 부쉈다느니 하는 장황한 배경 설명이 뭐 그리 대단하겠어요? 중요한 건 사연이에요, 사연. 사연 없는 지식은 영화에선 폭력일 뿐이라고요.
[결(結)] 무협을 순수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영화 ‘와호장룡’ 속 세계관이 왜 놀라운지 아세요? ‘강호에는 선과 악이 존재하질 않으며 단지 사연만이 있을 뿐’이라는 깨달음을 설파하기 때문이에요. 나쁜 것과 좋은 것의 경계를 허물고 심지어는 초월해버리는 매력 덩어리가 바로 사연이라고요.
아, 그런데 ‘사연’이라는 슈퍼파워가 현실 세계에선 유독 권력자들의 전유물이란 사실이 새삼 서글퍼요. 다주택자인 파워맨들에겐 “노모를 모시려는 것”이라느니 “불안한 노후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연들이 차고 넘치지만, 똑같이 노모가 있고 똑같이 노후가 불안한 장삼이사들에겐 이런 사연 대신 추상같은 법과 원칙만이 겨누어질 뿐이지요. 자식의 입시나 병역에서 특혜 시비가 일어난 언필칭 ‘초엘리트’(철학적으론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영화적으론 ‘어벤져스’에 가까운 존재로 추정됨)들이 구구절절 들려주는 애틋한 사연도 여간해선 ‘개돼지’들에겐 허용되질 않지요.
바로 이 순간,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속 짧은 문구가 별처럼 스쳐 지나가요.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 맞아요. 이젠 사연조차 평등하게 허락되지 않는 소설 같은 현실을 우린 살고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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