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달하고 따뜻한 가을의 맛 ‘밤’[스스무의 오 나의 키친]〈80〉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14일 03시 00분


요나구니 스스무 일본 출신·‘오 키친’ 셰프
요나구니 스스무 일본 출신·‘오 키친’ 셰프
‘Chestnut roasting on open fire…’로 시작하는 노래는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음악이다. 장작불에 밤을 구우면 톡톡 하고 밤껍질이 터지면서 나는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는 담장을 넘어 퍼진다. 가족이 모이고 사랑을 행복으로 엮는 마력을 가진 냄새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음악 속의 미국 토종 밤은 이제 거의 멸종 상태이다. 1904년 아시아종이 유입되면서 유해균이 퍼져 40년 만에 토종 밤나무 400만 그루가 죽었다. 숲을 강타한 역사상 최대의 생태학적 재앙으로 불린다.

천진꿀밤은 내게 처음으로 밤맛을 알려준 종이다. 크기는 작지만 쉽게 껍질이 벗겨지고 달고 맛있다. 마치 가마솥 아래 잿더미 속에서 갓 구워 낸 고구마를 먹는 느낌이었다. 내 고향 오키나와에는 밤나무가 없어서 도쿄의 포장마차에서 몸과 마음이 힘들고 추웠던 청춘기에 난생처음 맛을 본 것이었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 중국 베이징의 명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3년 전 가을 아내와 함께 전북 진안군 밤 줍기 행사에 갔다. 모자를 쓰고 장갑과 집게, 바구니를 챙겨 들고 나섰다. 솔직히 가지에서 밤송이를 떼는 것이 좋을지 떨어진 밤송이의 밤을 꺼내는 것이 더 좋을지 잘 몰랐다. 어찌 되었건 벌레가 없는 싱싱한 밤을 고르는 것은 어려웠다. 밤 줍기가 결코 즐겁고 로맨틱한 과정이 아니라는 걸 체험한 후에는 감사히 밤을 사 먹는다.

밤은 주로 미국, 유럽, 중국 그리고 한국, 일본에서 난다. 생산량은 중국에 이어 터키, 한국, 이탈리아, 일본, 프랑스 등 순으로 요즘에는 고급 식재료가 되었다. 1802년 이탈리아 농업경제학자는 재난 시 대체 음식으로 밤나무를 키웠다는 것을 밝혔다. 토스카니 산간에서 만들어 먹던 밤 뇨키와 밤 파스타 등이 있다. 밤은 가난의 상징이었으며 밤으로 빵을 만들었지만 이스트가 들어간 빵처럼 부드럽게 부풀지 않고 딱딱해 기근의 상징적인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밤은 프랑스 리옹 지역에 실크산업이 없어지면서 위기에 놓인 지역 발전에 공헌한다. 설탕에 재워 속은 부드럽고 겉은 달콤하고 바삭한 상태로 만든 밤캔디(marron glac´e), 밤을 갈아 만드는 몽블랑(Mont Blanc)도 19세기 파리에서 개발되어 오늘날 전 세계인들이 좋아하는 디저트가 되었다.

어릴 때 오키나와를 떠나 도쿄 외곽에서 자취를 하면서 살았던 시절이 있다. 아래층에 혼자 사시던 할머니는 항상 기모노를 입고 창가에 앉아 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하루를 보냈다. 집은 몇 칸의 다다미와 아주 간소한 부엌으로 한 사람이 겨우 살 수 있을 규모였다. 당시 나는 주로 라면만 먹고 살았고 그 특유의 냄새를 할머니가 의식했는지 어느 날 초대를 받았다.

메뉴는 달콤한 밤 몇 쪽이 들어 있는 밤밥이었다. 살짝 소금 간이 된 밥과 함께 씹는 밤은 더 달게 느껴졌다. 처음으로 밥에 간을 해 맛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걸 느꼈고 그것이 요리사가 된 나의 첫 요리 강좌였다.

요나구니 스스무 일본 출신·‘오 키친’ 셰프
#가을#밤#장작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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