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상회의를 하려면 몇 시간 전엔 알려주셔야죠.” 재택근무 중인 외국계 기업의 남자 임원 A 씨는 이런 항의를 받고 나서야 노트북컴퓨터 앞에 앉기 전 여자 부하직원들에게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단 걸 깨달았다. 이후 화상회의 횟수를 줄이고 시간도 정례화했다. 코로나19로 갑자기 닥친 재택근무는 한국인들이 굳이 알려고 하지 않던 많은 진실을 깨닫게 해준다.
▷고용노동부가 그제 내놓은 ‘재택근무 종합 매뉴얼’에서 회사원들이 높은 관심을 보인 부분은 주로 근태 관련이었다. ‘회사가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정보, PC 접속기록을 확인하겠다는데…’라는 질문에 매뉴얼은 ‘근로자 동의가 없으면 회사가 강요할 수 없다’고 돼 있다. 하지만 많은 기업이 입사 때부터 개인정보 이용 동의서를 받고 있고, 그룹웨어를 통해 업무 시작과 끝 시간을 체크하고 있어 집에서 일해도 인사담당자들의 감시를 완전히 피하긴 쉽지 않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회장은 최근 미국 금융대기업 중 처음으로 재택근무 중단 결정을 내렸다. “생산성이 전반적으로 떨어졌다. 직원 간 유기적 소통에 문제가 생겼고 창의적 아이디어가 차단됐다”는 이유다. “신입 직원들은 선배들로부터 일을 배울 기회가 원천 봉쇄됐다”고도 했다. 초봉 10만 달러가 넘는 인력을 쓰는 월스트리트 금융권이라면 인건비가 더 아까울 것이다. 넷플릭스의 리드 헤이스팅스 최고경영자(CEO)도 재택근무와 관련해 “아이디어를 놓고 토론하는 게 더 어려워졌다”고 불평했다.
▷반면 한국 기업들의 반응은 긍정적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매출액 기준 상위 100대 기업 중 88.4%가 사무직 재택근무를 실시하고 있다. 재택근무 생산성이 정상근무의 90% 이상이란 답이 절반 정도였다. 이렇게 미국 기업들과 다른 상황이 벌어지는 건 근무시간은 길어도 업무의 집중도는 낮았던 한국의 직장문화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늘어지는 회의, 상사 눈치만 보는 퇴근시간 등 불필요한 요소가 없어졌다는 뜻이다.
▷직원들 반응도 둘로 갈린다. “진정한 워라밸이 뭔지 알게 됐다”는 찬성파가 있고 “일과 개인생활의 경계가 무너져 엉망진창이 됐다”는 반대파도 적지 않다. 걱정되는 건 기업들이 기존에도 집에서 일했던 프리랜서와 출퇴근 정규직의 차이가 크지 않다고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인사권자와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면 성과에 대한 평가는 냉정해질 수밖에 없다. 일(work)과 생활(life)의 밸런스가 중요해도 언제 끝날지 모를 경기침체 속에서 일은 잃고 생활만 남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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