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가 ‘공정’을 외칠 때면, 자꾸 전두환 정권 때 ‘정의사회 구현’이 떠오른다. 불경스러운 연상 같아 미안하지만 내 의지론 어쩔 수 없다. 조건반사적 반응이니까.
우선 공정사회와 정의사회는 발음부터 비슷하다. 둘 다 대통령 취임사에서 처음 등장해 그 정권을 대표하는 구호가 됐다는 점도 같다. 결정적으로는, 공정 또는 정의를 내세우면서 전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는 점이 닮았다(두 대통령이 닮았다는 건 절대 아니다).
● 추미애와 손잡고 “공정은 촛불혁명의 정신”
문 대통령은 19일 청년의 날 행사에서 “특권과 반칙이 만연한 사회”를 지적하면서 “공정은 촛불혁명의 정신”이라고 강조해 국민의 염장을 질렀다. 그 기념사에 뒤집힌 심정을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기득권은 부와 명예를 대물림하고, 정경유착은 반칙과 특권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조국이 부와 명예를 대물림하고, 추미애가 반칙과 특권을 당연하게 여겼거든요.
“독재권력은 이념과 지역으로 국민의 마음을 가르며 구조적인 불공정을 만들었습니다.”→그럼 의사와 간호사로 국민의 마음을 가른 청와대는 뭔가요? 독재권력인가요?
“기성세대가 불공정에 익숙해져 있을 때, 문제를 제기하고 우리 사회의 공정을 찾아 나선 것은 언제나 청년들이었습니다.”→추미애 아들 문제를 제기한 당직사병도 청년이었어요.
“우리 정부 또한 청년들과 함께하고자 했고, 공정과 정의, 평등한 사회를 위해 한 걸음씩 전진하고 있습니다.”→우씨. 언제요 언제?
● 文정부가 ‘공정을 바라보는 눈’은 달랐다
이번 대통령 연설에서 가장 중요한 건 ‘공정을 바라보는 눈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라고 본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차별을 해소하는 일이, 한편에서는 기회의 문을 닫는 것처럼 여겨졌다”면서 문 대통령은 “공정을 바라보는 눈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 공정에 대해 더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밝힌 것이다.
그래서 진정 공정을 더 성찰하게 됐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문맥상으로 보면 인국공(인천국제공항공사) 사태를 언급한 건데 전체적으로 보면 이 정부가 자신들이 하는 일은 무조건 옳다고 믿는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공정경제3법, 외국어고 폐지 같은 교육개혁, 부동산정책, 심지어 권력기관 개혁과 4차 추경안까지 연설문에 언급된 모든 정책은 지고지순하기 한량없다.
심지어 문 대통령은 2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행사에 추미애와 나란히 입장함으로써 청와대가 공정을 보는 눈은 조국·추미애와 같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렸다. 그렇다면 혹시 추미애 아들이 억울한 누명을 쓴 게 아닐까 싶어지는 순간, 천만다행하게도 노무현 정부 때 정무수석을 지냈고 독설을 서슴지 않지만 틀린 말은 하지 않는 ‘엽기수석’으로 유명한 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이 사태를 한마디로 정리해줬다. “막말로 빽도 있는데 다 손 써서 휴가를 갔을 것”이라는 거다(21일 SBS ‘주영진의 뉴스브리핑’).
● 지배계급도 법의 지배를 받아야 공정한 것
여기서 공정이란 무엇인지 학술적으로 정의(定義)하는 건 시간낭비라고 본다. 한때 ‘정의란 무엇인가’로 한국에서 히트 쳤던 마이클 샌들의 정의론을 비롯해 정의(正義)와 공정(公正)에 대한 정의가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은 2011년에 내놓은 보고서 ‘복지국가와 사회정의’에서 “존 롤스의 정의론이 우리가 지향하는 복지국가를 안정적으로 지지해줄 수 있는 정의론이라는 점을 확인했다”면서도 “다른 사회철학적 입장들도 각기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고 밝혔다. 즉 정의와 공정을 바라보는 눈은 다를 수 있다는 거다.
다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점은 고대 로마법 이래 법(法)이 정의를 실현하는 의지의 산물로 인식돼 왔다는 사실이다. 법에 의한 지배(rule of law)는 그래서 중요하다. 특히 법치주의에서 피지배계급만이 아니라 지배계급 역시 정해진 법을 따르는 데 예외가 아니어야 공정한 사회다(집권세력이 자의적으로, 나는 빼고, 법을 집행하는 국가가 공정하다는 사람 있으면 당당히, 이름 걸고 댓글 달아주시기 바란다).
● 86그룹은 민주화운동을 한 게 아니다
문재인 정부의 집권세력은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것을 훈장처럼 자랑하는 집단이다. “당신들의 법과 사상은 부르주아지의 생산체제와 소유관계의 부산물이고 지배수단과 도구에 불과하다”는 공산당선언까지 들먹이고 싶진 않다. 그러나 민주화운동 세력이 정권을 잡았음에도 왜 과거 독재권력 뺨치는 반칙과 특권으로 구조적 불공정을 만드는지, 대통령은 그걸 왜 싸고도는지 나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집권세력 86그룹은 민주화운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면 쉽게 풀린다. “그들은 민주화된 대한민국을 추구하지 않았다”고 딴지일보 에디터와 ‘포린폴리시’ 한국어판 편집장을 지낸 노정태는 신동아 9월호에서 밝혔다. 과거 학생운동을 했던 봉달호(필명)는 “반미, 종북이 본질이었던 우리 운동을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도둑질하려고 은행에 들어갔다가 우연찮게 은행 강도를 잡은 도둑을 영웅으로 추앙하는 형국”이라고 신동아 7월호에 쓴 바 있다.
강준만은 ‘강남좌파2’ 책에서 집권 86그룹이 ‘도덕적 우월감’에 중독돼 있다며 그들이 이끈 한국정치가 불평등을 완화하기는커녕 오히려 확대재생산했다고 비판했다. 당연하다. 그들은 아침에 간을 빼놓고 출근해야 하는 일터에 나가 제 손으로 돈 벌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 “오늘날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부정의(不正義) 문제는 거의 대부분 박정희체제나 그 산물인 재벌체제, 혹은 신자유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된다”고 참 쉽게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 거대한 이권네트워크를 어찌할꼬
젊어서부터 전대협 ‘의장님’으로 권력놀음에 익숙한 그들은, 법은 우습게 알아도 권력의 효용가치는 안다. 노무현 정부에서 누린 권력은 짧았지만 야당 권력이나 노조, 시민단체 권력도 나쁘진 않다. 전화 몇 통이면 봐주고 챙겨줄 수 있는 운동권 출신 이권네트워크가 탄탄하고도 촘촘히 형성돼 있다. 민주주의를 배운 적도, 제대로 공부해본 적도 없는 그들에게 자유와 평등, 공정, 정의를 구하는 게 웃기는 일이었던 거다.
문 대통령과 함께 ‘검찰을 생각한다’는 책을 썼던 김인회는 작년 말 ‘정의의 미래―공정’이라는 책을 내놓았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초대 처장으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인물이라 거금 1만5000원을 주고 사서 읽고 나니 더 답답해졌다.
“미래비전의 정의와 공정의 관계를 생각하는 전제로서 인간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라는 난해한 문장으로 시작해서 결론은 사법개혁, 공수처 설치, 과거사 정리를 통한 인권과 평화였다. 문 정부가 자행하는 사법개악과 공수처와 과거사 뒤집기가 정의의 미래이자 공정이라면, 이 나라에는 정말 희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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