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의 상징, 선장[김인현의 바다와 배, 그리고 별]〈38〉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25일 03시 00분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조직의 수장을 흔히 ‘선장’에 비유한다. “선장으로서 이 위기를 잘 극복하겠다. 저도 여러분과 같은 선원의 한 사람으로 생사고락을 함께하겠다”와 같은 것이다. 선장은 조직을 이끌고 위기 탈출을 주도하는 리더십의 상징이라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다.

과거 여왕으로부터 항해의 명을 받은 선장이 선원들을 통솔해 숱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미지의 대륙에 도착한 경우 그 선장은 총독이 되었다. 큰 재산과 선원들을 책임지고 항해의 임무를 완성해야 하니 교양과 리더십을 갖춘 자만이 선장으로 임명됐다. 멀리 있는 선장에게 국왕이 지시할 수 없었으니 선장은 독자적으로 판단해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안전을 해치는 선원에 대한 생살여탈권도 선장에게 있었다. 여기서 권위가 생겨났다. 선박 연료유를 공급받거나, 하역회사를 정하거나 심지어 운송계약도 선장이 결정할 때가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과 함께할 선원들은 선장이 선정하도록 권한이 주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선박회사 본사에서 선원을 정해서 선장에게 통보하는 형식이다. 통신수단의 발달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미국 서부로 오고가는 항로는 두 가지다. 하나는 항정선(rhumb line) 항해로 위도 36도선을 따라 나란히 항해하는 형식이다. 다른 하나는 대권(大圈) 항해다. 사과에다 위아래 두 지점을 정하고 그 두 지점과 사과의 중심이 함께 지나도록 잘라 본다. 그때 두 지점에 그려지는 선이 대권이다. 이렇게 항해하는 것이 최단거리지만, 알래스카 주변까지 올라가므로 날씨가 나빠서 배는 흔들리고 힘이 든다. 선장들은 항상 고민에 빠진다. 항정선 항해로 3일이 더 걸리지만 편하게 갈 것인지, 아니면 빠르기는 하지만 힘든 대권항로를 택할지.

선박 임차인(정기용선자)이 선장에게 대권항로로 미국 서부에서 일본으로 가라고 지시했다. 선장은 항정선 항해를 택했다. 운이 나빠서 오히려 저기압을 만나 1주일 늦게 도착했다. 임차인은 선장이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서 추가된 일주간의 선박사용료 감액과 기름값에 대한 배상을 청구했다. 선주와 선장은 항로 선정은 선장의 재량사항인데, 임차인이 왈가왈부할 사항은 아니라고 항변했다. 최종적으로 영국 대법원은 임차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항로 선정의 결과에 따라 항해할 시간이 더 걸리는 문제가 발생하므로 시간에 따라 임차료를 지급하는 임차인(정기용선자)이 이를 결정할 사항이라고 보았다. 항로 선정도 이제는 선장의 재량으로 결정할 사항이 아니게 됐다. 500년 전 대항해시대의 선배 선장들로부터 내려오던 항로 결정권을 선장들은 이제 잃어버리게 됐다. 발달하는 태풍의 진로를 예상해 피항을 결정해야 하는 선장, 급박한 충돌의 위험에서 뱃머리를 어디로 돌려야 할까 결단을 내려야 하는 선장, 싸움꾼인 선원을 어떻게 말썽 없이 하선 조치시킬 것인지 고민하는 선장, 수천억 원의 선박과 화물을 싣고 미지의 바다를 항해해 목적지에 도착해야 할 책임을 수행하는 선장, 수출역군으로 애국심이 가득한 선장, 가족과 떨어져 자기를 희생하면서 온 가족의 생계와 교육을 책임지는 선장. 선장은 언제나 위기에서의 결단과 책임감, 희생정신과 애국심이 함께하기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리더십의 상징으로 회자되는 것은 아닐까. 선장이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자라면서 꼭 해 보고 싶은 직업 중 하나로 자리 잡기를 소망한다.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리더십#상징#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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