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홀로 나이아가라 폭포에 갔을 때 일이다. 비수기여서인지 단체 관광객들이 갈 만한 동선을 피해 다녀서인지 한국인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러다 캔맥주라도 사려고 들어선 편의점에서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을 만나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건넸다. “혹시, 한국인이세요?” 여기가 좋더라, 이 식당은 별로더라 가벼운 대화가 이어졌고, 한 아름 안은 맥주가 무겁게 느껴질 때쯤 내가 물었다. “아,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순간 그의 당황한 표정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왜, 왜요?”
당시 미국에서 교환학생을 지내던 나는 ‘어차피 안 볼 사이’에도 이름을 주고받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이들의 문화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한 터였다. 때로는 가식일지언정 미소 띤 얼굴로 주고받는 안부가 좋았고, 생면부지 타인의 이름과 일상을 궁금해할 수 있는 여유는 더 좋았다. 같은 버스를 기다리며, 지하철 옆자리에 앉아서, 의도 없이 공유했던 찰나의 시간들은 지나와 큰 추억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인의 정서에는 오늘은커녕 지금 보고 말 사이에 이름을 묻는 것이 다소 공포스럽게 느껴졌으리라. 한국 사회에서 통성명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익명에서 기명이 된다는 것. 서로의 일생에 ‘행인1’ 아닌 ‘조연’이 된다는 것. 이를 부담스럽게 여기는 것은 ‘어차피 안 볼 사이인데’라는 허무주의가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연의 길이 내지는 필요로 통성명의 여부, 추억의 자격을 재단한다.
사실 나도 그러한 허무주의에 빠져 지냈던 시기가 있다. 게스트하우스를 전전하던 배낭여행 시절,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다 보니 언제부턴가는 이름을 묻는 것조차 소모적으로 느껴졌다. 어차피 헤어질 사이이니까 그 편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 여행이 보다 만족스러워졌느냐 하면 전혀 아니었다. 관광지 한두 곳을 더 봤을지언정 도시 자체는 색깔 없이 남았다. 마음을 효율적으로 쓴다는 것이 그만 문을 닫아버린 것이었다. 닫힌 마음에는 그 어떤 감동도 흐를 수 없었다.
여행이 삶의 환유라면, 인생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인연은 헤어짐을 전제로 한다. 다만 그 길이와 밀도가 다를 뿐. 이 때문에 ‘어차피 헤어질 건데’라는 말은 사실 모든 인연에 해당되는 숙명과도 같다. 어차피 헤어질 인연이니 마음을 내어주지 않겠다는 것, 추억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것은 삶 전반에 대한 태도와 다름없다. 생의 끝자락에서 바라보는 추억의 가치는 시간의 길이에 비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기욤 뮈소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아빠, 만약에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 볼 수 없을 땐 어떡해야 돼?” “행복했던 때를 생각해. 그 사람하고 가장 행복했던 순간. 그 기억만으로도 살아져.”
어차피 헤어질 테지만 그래도 추억은 남는다. 때때로 다칠지언정 모든 찰나의 추억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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