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장애 아버지의 코로나 시대 위암수술기[광화문에서/신광영]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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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영 사회부 차장
신광영 사회부 차장
며칠 전 한 대학병원 진료실에서 아버지는 의사와 마주 앉았다. 간호사와 어머니, 나를 포함해 진료실에 있던 5명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아버지는 10년쯤 전 청력을 거의 잃어 상대 입 모양을 봐야 겨우 알아듣는다. 의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마스크 속을 맴돌았다.

“수술을 하는 게 좋겠습니다. 70% 정도 잘라내야 할 거 같네요.”

얼마 전 아버지는 위암 판정을 받고 내시경 시술로 암 조직을 떼어냈다. 하지만 암세포가 일부 남아 있어 위를 절제해야 한다는 진단이었다.

아버지는 의사와 가족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의사는 메모지에 3과 0.3이라고 써보였다. 수술을 안 할 경우 암이 번져 사망할 확률이 3%, 수술 후 합병증으로 고생할 확률이 0.3%였다. 10배 차이인 두 숫자에 아버지의 눈길이 머물렀다. 수술을 받아들이는 대가를 가늠할 수 없어 혼란스러운 눈빛이었다. “수술 대신 1년 정도 경과를 보면 안 될까요?”

의사는 말없이 친절한 표정을 유지했다. 수술의 불가피성을 이미 자세히 설명했던 터였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이날 상담은 전공의 파업으로 미뤄지다 어렵게 잡은 예약이었다. 전공의들이 복귀해 수술이 가능해진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다. 어머니와 나는 ‘수술해야 한다’는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의학의 답은 나와 있었지만 자신의 답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온전히 환자의 몫이었다. 아버지는 체념한 듯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진료실에서 나오자마자 간호사는 준비해 놓은 병원 내부 약도를 건넸다. 수술 전 받아야 할 검사가 빨간 펜으로 빽빽이 표시돼 있었다. 아버지에겐 이제는 사라질지 모를 예전의 자신을 애도할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우리는 ‘드라이브스루’ 하듯 혈액검사실, 폐·심장검사실 등을 바쁘게 통과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아버지는 가급적 이날 검사를 마쳐야 했다. 말없이 뒤따르던 아버지는 딱히 누가 들을 것이란 기대 없이 말했다. “내시경으로 끝나는가 보다 했는데 결국 잘라내야 한다고 하니까….”

아버지는 점심으로 설렁탕에 찬물을 섞어 몇 숟갈을 드셨다. 식도락을 누구보다 즐겼던 아버지에게 이제 허락되는 음식이 많지 않았다. 30년 넘게 105사이즈를 입었던 아버지는 얼마 전부터 100사이즈를 입는다고 했다. “수술하고 나면 95 입어야 된다”며 호탕하게 웃는 아버지의 웃음소리에 예전의 식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상실감이 배어 있었다.

식사 후 원무과 앞에서 입원실 예약을 할 때였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마스크 쓴 사람들 틈에선 아무 말도 들을 수 없는 아버지는 어머니의 간병이 필요했는데 동반 입원을 하려니 선택지는 1인실뿐이었다. 원무과 직원은 “코로나에 의료파업 여파로 입원실이 별로 없다”고 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다인실이 좋다고 고집을 부렸다. “1인실에 혼자 있으면 죽을병에 걸린 것 같잖아.”

어머니와 내가 입원 예약을 하는 동안 아버지는 대기석 맨 앞줄에서 TV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브라운관 속 배우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은 거의 유일한 현대인이었다. 아버지는 그들의 입을 바라보며 병원에 온 것을 금세 잊은 듯 환하게 웃었다. 어느덧 백발이 된 아버지의 어깨에 부쩍 헐렁해진 셔츠가 흘러내릴 듯 걸쳐 있었다.

 
신광영 사회부 차장 neo@donga.com


#코로나19#위암수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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