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배출되는 의사 수는 약 3100명. 이 중 상당수는 각 병원의 인턴으로 의사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공보의를 가거나 3, 4년의 전공과 근무를 마친 뒤 군의관이나 개업의가 된다. 또 절반가량은 병원에서 2년 정도 전임의를 거쳐 의대 교수가 된다.
그러나 의과대학 정원 확대 등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의료계 파업과 함께 전국 의대생들이 집단으로 의사 국가고시(국시) 실기시험에 응시하지 않으면서 자칫 내년 배출 규모가 400여 명에 그칠 상황이다. 갑자기 2700명가량이 부족해지는 것이다. 현재로선 이들이 바로 국시에 응시할 뾰족한 방안이 보이지 않는다. 의대생 중에는 다른 진로를 고민하거나 외국 의사면허를 준비하는 경우도 있다. 일단 학업을 다시 시작한 뒤 의사가 되는 걸 한 해 미루겠다는 학생도 있다.
의사 배출이 급감하면 병원마다 내년 인턴 선발이 어려워진다. 특히 현장에선 후년 더 큰 의료공백 사태가 올 것이라고 우려한다. 자칫 대부분의 병원에서 외과 흉부외과 산부인과 등 중증·생명 관련 진료과의 지원자가 ‘제로’가 되는 최악의 상황이 올 수 있어서다. 이뿐만 아니라 인턴 배출이 안 되면 공중보건의나 군의관 지원이 거의 없게 돼 공공의료를 맡을 의사가 사라지는 상황이 된다. 무의촌 지역에서도 그나마 의료시스템이 유지된 건 공중보건의들이 전국 곳곳에 파견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년 공보의가 급감하면 의료공동화가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극소수의 인턴은 서울로 몰릴 게 불 보듯 뻔하다. 이른바 서울대병원, 세브란스병원, 서울아산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성모병원 등 ‘빅5 병원’을 뺀 지방 병원은 인턴이 전무한 상황이 될 수 있다.
예상되는 상황은 심각한데 정부나 보건당국은 요지부동이다. 그 대신 여론을 내세우며 사실상 학생들의 ‘사과’를 요구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의료현장과 직접 관련이 없는 의대생에게까지 사과를 요구하는 건 무리라는 의견도 나온다. 진료 차질 등 집단행동으로 인한 환자 불편에 대해선 선배 의사들이 사과할 일이라는 것이다.
보건복지부는 최근 보건 담당 차관 신설로 인해 의료계 현안을 적극적으로 풀어나갈 역량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의대생 문제와 관련해선 합의점을 찾아가는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고 있다. 그 사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의료계(특히 전국 병원장, 의대학장, 대한의사협회)는 국회와 접촉하면서 정치권에서 해법을 찾는 모습이다.
어찌 됐든 현 상황의 시작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정부가 의료계와 충분한 대화 없이 10년 동안 의대 정원을 4000명 늘리고 공공의대를 설립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대구경북의 코로나19 위기를 극복한 건 의료계의 역할이 컸다. 감사의 뜻을 전하는 ‘당신 덕분에’라는 수어 캠페인까지 벌였던 정부이기에 의료계는 더 큰 배신감을 느끼는 분위기다.
최근 의대생 70여 명은 ‘거리로 나오게 된 의대생’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들은 “공공의대의 비리와 정책의 허술함을 알리고자 했으나 알맹이는 잊혀지고 국시를 거부하는 의대생을 향한 비난만 남았다”면서도 “이번 사태를 통해 폐쇄적인 문화에서 벗어나 대중의 입장에서 목소리를 전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의 단초를 제공한 정부와 여당은 국민들에게 유감스럽다고 사과한 적은 있는가? 의대생을 볼모로 잡고 사과를 요구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공무원 시험은 자격시험이 아니라 경쟁을 해서 정해진 인원을 뽑는 선발시험이다. 하지만 의사면허 시험은 간호사면허, 심지어 운전면허처럼 일정 요건을 갖춘 사람의 통과 여부를 정하는 자격시험이다. 공무원 시험은 시험 일정을 변경해 구제하면 앞선 응시자가 불이익을 당하지만, 자격시험은 그렇지 않다. 형평성 문제 발생이 없다는 이야기다. 심지어 기술직 공무원 시험도 응시자가 부족하면 추가 시험을 시행하기도 했다. 또 외국에선 실기시험도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3, 4차례 응시 기회를 주기도 한다. 최악의 사태가 오기 전에 지금이라도 보건당국과 의료계는 문제 해결을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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