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의 수술실 내 불법 행위를 근절할 ‘최후의 보루’일까, 환자의 프라이버시 침해 위험을 높이는 ‘과잉 입법’일까.
수술실 폐쇄회로(CC)TV 설치 의무화에 대한 환자와 의사들의 의견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환자들은 유령수술(환자의 동의를 받지 않은 의사나 무자격자가 수술을 대신하는 행위)과 성희롱 등 인권 침해를 막으려면 CCTV 설치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올 7월 한 여론조사에서 일반 성인의 73.8%가 수술실 CCTV 설치 의무화에 찬성했다.
반면 의료계는 “일부 의사의 일탈을 근거로 감시장치를 두는 건 득보다 실이 크다”고 반박한다. 근거는 크게 두 가지다. 환자의 민감한 부위가 찍힌 CCTV 영상이 외부로 유출될 가능성이 있고, 수술 시 집중력이 떨어지거나 위험한 수술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커져 결국 환자에게 손해라는 주장이다. 2018년 경기도의사회의 설문에선 78%가 수술실 CCTV 설치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외에는 아직까지 수술실 CCTV 설치를 의무화한 나라가 없다. 그럼에도 국민의 상당수는 설치를 원하고 있다. 최근 편도 수술 사고로 여섯 살 아들을 떠나보낸 아버지가 “의료사고 진상 규명을 위해 수술실 CCTV 설치를 의무화해 달라”고 올린 청와대 국민청원은 20만 명 이상의 공감을 얻었다. 정부는 지난달 답변에서 “숙고 과정에 있다”며 입법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국회에는 관련 법안 2건이 계류 중이다.
○ CCTV 설치하니 67%가 촬영 동의
수술실 CCTV 설치 의무화 법안은 이른바 ‘권대희법’으로 불린다. 2016년 고 권대희 씨(당시 25세)가 서울 강남의 한 성형외과에서 안면윤곽 수술을 받던 중 과다 출혈로 숨진 사건이 계기가 됐다. 당시 집도의는 여러 환자를 동시에 수술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실이 CCTV에 찍혔다. 권 씨는 3500cc나 되는 피를 쏟았지만 처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CCTV가 없었다면 사망 원인은 묻힐 뻔했다. 법정에서 병원 측은 출혈량이 1000cc 안팎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CCTV를 통해 흡인통에 들어가는 피의 양을 확인할 수 있었다. 권 씨의 어머니 이나금 씨(59)는 이 영상을 500번 이상 돌려봤다. 법정 다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소된 의사들은 여전히 메스를 잡고 있고, 병원도 그대로 운영 중이다. 이 씨는 “CCTV가 있어도 발뺌을 하는데, 그마저 없다면 환자들은 의료사고의 책임 소재를 규명할 방법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수술실 사고가 잇따르고 환자의 불안감이 커지자 수술실에 CCTV를 설치하는 곳도 늘었다. 경기도의료원은 2018년 10월 안성병원을 시작으로 지난해 5월부터 6개 공공병원에서 CCTV를 운영 중이다. 지난해 5월부터 올 8월까지 이뤄진 수술 3853건 중 환자가 촬영에 동의한 비율은 약 67%(2569건)이다. 전북에서도 도내 공공 의료기관 3곳에 수술실 CCTV가 설치됐다.
서울 강남의 성형외과들은 고객 유치를 위해 CCTV를 설치하는 곳이 늘어나는 추세다. 환자가 원할 경우 대기실에서 수술 장면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곳도 생겼다. 그러나 여전히 수술실 CCTV 설치율은 낮은 편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전국 의료기관(조사에 응한 1722곳 기준)의 수술실 CCTV 설치율은 14.1%로 나타났다. 추가 설치 의향을 가진 곳도 15%에 불과했다.
○ CCTV 있으면 수술 성과 떨어지나
“의료인은 감시 없이 자유롭게 일할 때 최고의 성과를 내고….”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에서 지난달 발표한 보고서에 담긴 내용이다. 연구소는 “수술실 CCTV 설치는 의사를 잠재적 범죄자로 규정하고, 의료인과 환자 간의 신뢰 붕괴를 가져온다”고 했다.
그러나 반론을 제기하는 의사들도 적지 않다. 성형외과 수술실에 CCTV를 설치한 이대성 원장은 “CCTV가 있어도 수술 결과가 달라질 게 없다”며 “오히려 환자들이 수술 과정에 의문을 제기했을 때 의료진을 방어할 수 있는 장치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유령수술을 의심하는 환자에게 수술실 CCTV를 보여준 적도 있다.
다만 CCTV 영상 유출 가능성은 찬성 측에서도 우려하는 부작용이다. 그러나 환자단체 등에선 영상 유출이 두려워 불법 행위를 방치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한다. 환자의 민감한 부위가 노출될 때는 녹화하지 않고, 수술포로 덮은 뒤부터 수술 부위 중심으로 촬영하는 방법도 있다.
외국에서도 수술실 CCTV 설치를 의무화하진 않았지만 환자 권리 보호는 강화하는 추세다. 보건의료 전문 법무법인 히포크라테스 박호균 변호사는 “영국은 중환자실과 투석실에 CCTV를 의무적으로 설치한다”며 “수술실처럼 환자가 스스로 권리 침해를 입증하기 어려운 공간에서 환자 보호를 위한 안전장치를 둔 것”이라고 설명했다.
○ “유령수술 못 하게 될까 봐 두려운 것”
의사의 70% 이상이 수술실 CCTV 설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건 사실일까. 의료시스템을 현 상태로 유지한 채 질문한다면 진심에 가깝다. 하지만 속내는 다르다는 얘기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30년 차 외과의는 “과도한 진료 및 수술 부담을 줄여주면 의사들의 80% 이상은 CCTV 설치를 찬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무슨 뜻일까. 의사들이 CCTV 설치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만연한 유령수술을 더 이상 못하게 되는 게 두려워서다. 병원들은 대체로 더 많은 환자를 진료하는 박리다매 구조로 이윤을 얻는데, 수술도 그중 하나다. 이 과정에서 대리수술도 횡행할 수밖에 없다는 게 의료계의 설명이다. 이 외과의는 “수술실 사고로 문제가 된 성형, 정형외과뿐 아니라 대형 병원에서도 대리수술은 심심찮게 일어난다”며 “한 의사가 여러 수술을 돌아가며 집도하도록 만드는 의료시스템을 개선하는 게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실제 수술실에서 환자가 동의하지 않은 의료진이나 비의료인에 의한 수술실 의료행위는 만연해 있다. 간호사가 진료보조인력(PA)으로 수술 및 처치를 대신하는 경우도 흔하다. 더불어민주당 권칠승 의원실이 전국 16개 국립대병원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PA 간호사는 2015년 592명에서 지난해 972명으로 64% 급증했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은 전국 PA 간호사 규모를 약 1만 명으로 추산한다. 의료기관의 약 69%가 PA 간호사를 운영 중이다. 이들이 간단한 수술을 집도하거나, 약물 투입 등 각종 처치나 검사까지 의사의 역할을 대신한다.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응급실이나 진료실 등에는 의료진의 안전 등을 이유로 CCTV가 거의 설치돼 있다”며 “수술실 CCTV만 반대하는 건 무자격자의 대리수술을 숨기려는 의도”라고 지적했다.
수술 과정을 영상으로 남기는 것이 의사들이 펄쩍 뛸 만큼 금기시돼 온 건지도 살펴봐야 한다. 병원들은 수술을 생중계하는 등 학술 목적이나 홍보를 위해선 수술 영상을 적극 이용해 왔다. 수술 과정을 세밀하게 기록하려는 노력도 활발하다. 캐나다 토론토의 성 미카엘 병원은 수술실에 ‘블랙박스’를 설치했다. 의료진 간 대화뿐 아니라 수술 기구의 움직임, 환자의 혈압 등 생체 신호를 기록하는 장치다. 항공기 블랙박스가 모든 운항 정보를 기록하는 것과 유사하다. 사고가 났을 때 원인을 밝힐 수 있고, 복기를 통해 수술실 상황을 개선하는 데 활용한다. CCTV보다 사생활 침해 우려도 적다.
○ 유령수술 처벌 강화 시급
환자들의 수술실 CCTV 설치 요구가 높은 것은 의료사고에 대한 정당한 배상을 받기 어려운 현실과도 관련이 있다. 의료기록을 갖고 있는 병원과 의사를 상대로 원인 규명이 쉽지 않아 CCTV 영상이라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안덕선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장은 “의료행위 중 벌어지는 사고는 형사처벌 대상이 될 수 없고, CCTV가 모든 증거를 잡아낼 수도 없다”며 “배상제도를 강화해 환자들의 불만을 줄여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수술실 CCTV는 찬성하는 측에서도 ‘필요악’으로 본다. 의사의 직업 수행의 자유 침해 논란도 있다. 그럼에도 CCTV 설치 찬성 여론이 높은 건 불법 행위를 저지른 의사에 대한 처벌 수위가 낮기 때문이다. 2013∼2018년 무면허 의료행위 적발 건수는 112건에 이른다. 그러나 이 중 7건(6.3%)만 의사면허 취소 처분이 내려졌고, 105건은 자격 정지에 그쳤다.
성형외과의 유령수술 실태를 폭로해 온 김선웅 원장은 “CCTV 설치도 중요하지만 불법을 저지른 의사에 대한 강력한 처벌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수술실 CCTV 설치를 의무화한 나라는 없지만, 한국처럼 유령수술 의사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 나라도 없다”고 비판했다.
수술실 CCTV 논란은 의사 직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 수준을 보여준다. 이일학 연세대 의대 의료법윤리학과장은 “직업인을 CCTV로 감시하는 건 지양해야 하지만 환자들의 불신은 결국 의사들이 자초한 측면이 있다”며 “잘못된 관행이나 위법 행위를 바로잡으려는 자정 작용이 미진했다”고 지적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