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으로 급히 내려오는데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아이가 혼자 울고 있었어요. 일단 데리고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8일 늦은 밤 대형 화재가 발생한 울산 삼환아르누보 주상복합아파트 29층 주민 장재현 씨(23)는 당시 가족들과 비상계단을 내려오다가 멈춰 섰다. 계단까지 연기가 들어차 2m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부모를 잃고 울고 있는 아이가 눈앞에 있었다.
“우리 죽는 거 아니에요?” 아이는 장 씨를 보고는 엉엉 울었다. 장 씨는 집에서 들고 나온 소화기를 보여주며 “우리 절대 안 죽는다”고 아이를 다독였다. 29층에서 1층까지 내려가려니 마음이 급했지만 장 씨 가족은 아이의 걸음에 맞춰 계단을 내려왔다.
불길이 강풍을 타고 순식간에 33층 건물을 휘감았던 그날 밤, 아파트에는 장 씨 같은 이웃이 적지 않았다. 33층 주민 이승진 씨(55)는 화재 소식에 집 밖으로 나오자 옥상 입구에 모여 있는 주민 20여 명을 발견했다. 이들은 옥상 문 근처에 잔불이 있어 “밖으로 못 나간다”며 발만 동동 굴렀다. 이 씨는 지체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평소 화재에 대비해 옥상 구조를 미리 파악해 뒀던 것. 이 씨는 “옥상 안쪽에 넓은 공간이 있어 주민들과 안전하게 피했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대피하면서도 어딘가 갇혀 있을지 모를 이웃들을 떠올렸다. 23층 주민 노미숙 씨(48·여)는 불길이 거세 일단 안방에 머물다가 이웃의 연락을 받고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노 씨는 “먼저 대피한 분들이 ‘지금은 불이 강하니 안전한 곳에 있으라’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될 것 같다. 얼른 내려오라’고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려줘 안전하게 밖으로 나왔다”고 했다. 28층 주민 김모 씨(53·여)도 “문으로 연기가 들어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이웃집 분이 안방 창문을 두드리며 ‘여기로 나오라’고 해 살았다”고 말했다.
주민 임창덕 씨(56)는 10년을 키운 가족 같은 고양이 ‘밍키’가 구석으로 숨어버렸지만 챙기지 못하고 나와야 할 정도로 상황이 급했다. 그 와중에도 임 씨의 아들(24)은 “옆집에 어린애들이 있어서 꼭 깨워야 한다”며 “불났다”고 고함을 지르며 한참 문을 두드렸다고 한다.
옥상으로 대피했던 주민 26명은 어린이와 여성을 앞세우고 내려왔다. 1층에 도착하기까지는 30분이 걸렸다. 화염이 아파트를 집어삼키던 그 절체절명의 시간 동안 어느 누구도 “빨리 가자”는 독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주민 허모 씨(44)는 “두 딸을 데리고 대피하다가 순식간에 연기가 덮쳐 아이들을 잃어버렸는데 이웃 주민이 계단에 있던 딸들을 옥상으로 데려가줬다”며 “아이들을 살아서 다시 만나게 돼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불은 15시간 반 만인 다음 날 9일 오후 2시 50분경에야 꺼졌다. 무시무시한 화재였지만 사망자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울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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