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회화사에서 여성이 책 읽는 모습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중세 및 르네상스 시기에 많이 그려진 수태고지(受胎告知) 그림이 그 좋은 예이다. 대개의 수태고지 그림에서는 성령(聖靈)에 의하여 잉태하였음을 마리아에게 알리려고 온 천사 가브리엘과 그 소식을 듣고 놀란 마리아의 모습이 그림의 중앙을 차지한다. 책은 마리아의 옆에 작게 펼쳐져 있다. 이런 점에서, 안토넬로 다메시나(1430∼1479)의 수태고지 그림은 획기적이다. 안토넬로의 그림은 천사 가브리엘을 지우고, 수태고지를 받은 마리아의 반응에 집중한다. 그러다 보니 마리아 앞에 놓인 성서는 한층 더 부각된다. 그래서 안토넬로의 수태고지 그림과 그 이후 수없이 그려진 책 읽는 여성의 모습은 꽤 유사하다. 여성과 책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다만 여성이 읽는 책이 성서에서 세속의 책으로 바뀌어 갔을 뿐.
한국 회화사의 경우는 어떤가? 전통 시대를 통틀어 책 읽는 여성을 묘사한 그림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그 드문 예가 윤덕희(尹德熙·1685∼1776)의 그림이다. 책 읽는 여성의 자세와 배경을 감안할 때, 윤덕희의 그림은 아버지 윤두서가 18세기 초에 그렸다고 알려진 그림인 미인독서(美人讀書)의 영향하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차이도 분명하다. 윤두서의 그림은 책을 읽지 않는 다른 여성과 기물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반면, 윤덕희의 그림은 홀로 책 읽는 여성에게 집중하고 있다. 그 여성은 홀로 있지만, 혹은 홀로 있기에, 책을 통해 보다 큰 세계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윤덕희의 그림에 묘사된 이 여성은 과연 무슨 책을 읽고 있는 것일까? 제목이 드러나 있지 않아 확실하지 않지만, 책의 모양과 책을 읽는 자세를 감안할 때 경서(經書)를 읽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이웃 나라의 전통 회화사에는 여성이 가벼운 책을 누워서 읽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존재하지만, 한국 회화사에서 그런 그림을 찾기는 어렵다. 임윤지당(任允摯堂)이나 강정일당(姜靜一堂)처럼 경서를 읽고 수양에 매진한 여성들이 칭송받은 사례가 한국 역사에는 제법 있다. 윤덕희의 그림은 아마 그러한 여성을 묘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윤덕희가 살았던 시대의 많은 여성들이 보다 열정적으로 읽은 책은 경서가 아니라 소설이었다. 특히 한글 소설이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었는데, 한글 소설은 당시에 고급 문화가 아니라 하위 문화에 속했다. 당시 문화에서 경서와 한글 소설이 대척점에 있었다는 사실은 여러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윤덕희와 대체로 같은 시대를 살았다고 할 수 있는 18세기 지식인 채제공(蔡濟恭)은 죽은 자신의 아내가 필사한 경서에다 서문을 썼다. 그에 따르면, 당시 보통 여자들은 소설류를 책 대여점에서 빌려다가 탐닉하는 데 반해, 채제공의 아내는 경서를 필사했기에 자랑스럽다. 또 한 명의 18세기 지식인인 유만주(兪晩柱)는 자신의 일기 ‘흠영(欽英)’에서 한글 소설 몇만 권을 넓은 벌판에 쌓아 놓고 다 태워버리자는 제안을 기록하고 있다. 그래야 종이 낭비를 막고, 여성들이 자기 본분에 충실할 수 있다나. 요컨대 당시 한글 소설 읽기는 여성들에게 꽤나 인기가 있었으나, 범사회적으로는 결코 존중받지 못했던 습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황은 한국 회화사에 왜 여성이 독서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드문지를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조선 후기 여성들은 대체로 한글 소설을 많이 읽었지만, 그러한 독서는 그들의 합당한 일로 간주되지 않았고, 특히 당시 지배층으로부터 존중받지 못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한글 소설을 읽는 여성의 모습이 그림으로 그려져 대대로 전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물론 세상은 바뀌었다. 출판계 사람들은 다 알다시피 오늘날 출판계를 지탱하는 독서 인구의 대부분은 여성이다. 현대에 이르면 독서하는 한국 여성을 그린 그림을 좀 더 쉽게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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