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에 ‘질의 응답’이라는 책을 선물 받았다. 30년 가까이 여성의 몸으로 살았지만 나의 ‘질’에 대해선 너무 몰랐다며, 만나는 여자들마다 선물하고 다니는 친구 덕분이다. 이 책은 여성 성기에 관한 잘못된 정보 때문에 여성들이 도리어 수치심을 가지는 현실을 자각한 노르웨이 의사 니나 브로크만과 의대생 엘렌 스퇴켄 달이 쓴 ‘여성 성기 사용 설명서’이다. 거울 앞에서 다리를 벌려 자신의 생식기를 관찰하는 것부터가 숙제다. 탐폰, 생리대, 생리컵부터 피임과 임신중단(낙태)까지 여성들이 뜬소문이 아닌 정확한 정보로 무장해 자신감과 확신이 있는 상태에서 각자의 선택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책을 읽으니 더 많은 의학 정보들이 여성에게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테면 원치 않은 임신을 했을 경우 동네 어느 산부인과에 가야 임신중절 시술을 받을 수 있는지, 그 비용은 얼마이며, 다음 날 출근을 할 수 있는지, 어느 병원이 더 안전한지 등에 관하여.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를 처벌하는 법이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1953년 형법 제정 후 66년 만의 변화였다. 드디어 여성이 원치 않은 임신과 출산, 몸에 대한 통제로부터 해방의 길이 열리는 듯했다. 하지만 2020년 10월 7일 정부는 ‘낙태죄’를 완전 삭제하는 대신, 임신중단을 부분적으로 허용하겠다는 ‘입법예고안’을 내놓았다. 임신 주수에 따라, 허용 사유에 따라 제한을 두고 일부 임신중단만을 허용한 것이다. 이는 명백한 퇴행이다.
낙태죄 유지를 주장하는 한 국회의원은 ‘낙태가 남용될 수 있음’을 우려한다고 했다. 이는 ‘암 치료 수술이 무료화된다면 사람들이 암에 걸리고 싶어 할 것이다’와 같은 소리다. 여성의 몸에 무리가 많이 가는 수술을 여성들이 어떻게 남용한단 말인가. 오히려 남성 파트너들이 남용할 소지가 있겠다. ‘혹시 임신해도 낙태하면 되니까 콘돔 안 하고 해도 되지?’ ‘불법도 아닌데 가서 낙태해.’ 너무 심한 말 같지만 동아일보가 5년간 전국 법원에서 이뤄진 낙태 관련 판결 80건을 분석한 결과 여성들을 낙태죄로 고소, 협박한 이들도 대부분 ‘남자친구’ 혹은 ‘남편’, ‘남성 측 가족’이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짓 히어는 낙태가 살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낙태 횟수를 0건으로 줄이기 위해 사춘기에 도달한 모든 남자 청소년에게 정관수술 의무를 부과하는 건 어떨까요? 훗날 그 남성과 배우자가 아이를 갖고 싶어지면 풀어주는 걸로요!” 그러자 누군가 외쳤다. “어떻게 그런 말을…. 정관수술 강제는 신체 자율권을 침해하는 거잖아요!” “맞아요! 하지만 출산을 강제하는 것만큼 심각한 침해는 아니잖아요?” 10분이면 통증 없이 끝나는 정관수술도 강제하면 반발할 사람들이 품는 데만 열 달이 걸리고, 목숨이 달려 있고, 누군가의 평생을 책임져야 할 수도 있는 일을 ‘생명은 소중하다’는 이유로 비판한다. 잠재적 생명보다 중요한 건 눈앞에 살아 있는 생명체인 여성이다.
강한 규제는 낙태를 없애지 못한다. 다만 위험한 낙태를 만들 뿐이다. 힐러리 클린턴은 “여성이 자신의 몸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인생과 자신이 책임지게 될 다른 생명에 대해 다른 어떤 누구보다도 가장 숙고할 것임을 믿기 때문에 낙태합헌을 지지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어떤 여성이 낙태를 한다면, 그건 그 여성이 자기 인생에 책임을 지기 위해 행하는 가장 무거운 결정일 것이다. 죄라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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