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피살 사건 文정권 부실 대응은
‘국민생명 보호’ 국가 역할 외면 첫 사례
편집증적 이념집착에 권력욕심까지 결합해
檢·警·軍·官에 정권의 코드로만 움직이게 강요
어느 정권이든 뻔뻔한 이들이 있었다. 어느 정권이든 포퓰리즘적 정책도 있었다. 물론 조국 추미애 사태처럼 후안무치한 사례는 찾기 어렵고, 이 정부처럼 순식간에 재정과 공공부문을 빚더미와 적자로 급락시킨 전례도 없다.
하지만 그런 모든 실책과 잘못은 과거 정권들과 비교할 때 경중(輕重), 양적 차이의 문제였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은 이번에 대한민국 건국 이래 어느 정권에도 없던 차원이 다른 신기록을 세웠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보호라는 국가의 기본 존재 이유 자체를 외면한 것이다.
무능과 악의는 구분돼야 한다. 물론 세월호 참사 때 박근혜 정부의 대응처럼 무능과 성의 부족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지만 고의, 악의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북한군의 공무원 사살 당시 정부의 부실 대응도 무능의 산물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런데 집권세력의 대응은 그런 믿음을 자꾸 깨뜨린다. 그저 무능의 산물이었다면, 섣불리 월북으로 단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초의 시신 소각 발표를 희석시키는 셀프 물타기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조명탄도 안쏘는 눈치보기 수색과는 달랐을 것이다.
그저 무능의 산물이었다면, 살해 최고책임자를 ‘계몽군주’로 칭송하는 대신 책임자 처벌과 규탄에 진정성을 담았을 것이다. 대통령은 피해자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위로하거나 답장에 최소한 친필 서명이라도 했을 것이다.
이런 모든 사실들은 이 정권의 부실 대응이 고의적인 것이라는 심증으로 기울게 한다. 남북관계 진전이라는 정권 어젠다에 집착하느라 국민 생명 보호를 후순위로 돌린 것이다.
근본적 질문이 안나올 수 없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안보는 왜 하고, 외교는 왜 하고, 남북관계 개선은 왜 하려는 건가. 다 국민이 안전하게 살게 해주기 위한 것 아닌가. 외교도 정치도 그 궁극적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 이 정권은 수단과 목적을 바꿔 버렸다.
집권세력은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아주 오랜 기간 한 생각에 매몰되다 보면 차츰 집착으로 변질되기 마련이다. 만나는 사람도, 접하는 정보와 의견도 같은 편끼리만 소통하니 편향된 생각은 차츰 돌덩이처럼 변형되어버리는데, 변화한 시대의 상식으로 보면 ‘광기’ 수준이 되어 있기 십상이다.
“토착왜구라고 부르는 일본 유학파, 일본 유학을 다녀오면 민족반역자가 된다”고 한 작가 조정래 발언 파문을 보면서 대학시절 태백산맥에 매료돼 독파하다 들었던 아쉬움이 떠올랐다. 작품속 등장인물들이 도식적으로 정형화되어 있는 것 같다는 아쉬움이었다.
당시 윤흥길 황석영 현기영 등 많은 작가들이 6·25, 빨치산, 분단 이념비극을 다룬 역작들을 내놓았는데 그들의 작품 속 인물들이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인간 심성을 담아낸 것과 달리 태백산맥의 등장인물들은 어떤 틀에 따라 도식적으로 만들어냈다는 느낌이 강했다.
작가가 세상과 역사를 다층적 복합적으로 접근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나름의 비평도 해가면서 읽었는데, 이번에 발언 파문을 보면서 수십 년간 한 방향으로만 생각하면 결과가 이렇게 처참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역시 오랜 집착의 산물인 현 집권세력의 안보관은 이제 북한이 ICBM을 들고 나와도 우리를 겨냥하는 게 아니라고 치부하며, 김정은의 달콤한 수사(修辭)에만 반색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 본토를 겨냥한 북한의 ICBM 핵전력은 실제 미국을 공격하는 게 목적이라기 보다는, 한반도 유사시 미국의 전면 개입을 막기 위한 도구다. 물론 북한이 실제 남한을 상대로 쉽게 전면 무력도발에 나설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하지만 미국이 북한의 ICBM 핵공격 가능성을 경계해 전면 개입에 제약을 받는 안보환경이 조성되는 것 자체만으로도, 즉 안보 균형추가 살짝이라도 흔들리는 자체만으로도 외국인투자자와 외환시장이 동요하고, 증시는 흔들릴 수 있다. 북한의 ICBM과 핵은 결국 우리 국민의 생존과 살림살이를 흔들려는 무기인 것이다.
그런 기본적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정부는 김정은 발언에만 반색하고, 한미동맹이 흔들리면 바로 경제에 악영향이 온다는 걸 알면서도 주미대사를 비롯해 여당 정치인들은 한미동맹 때리기 경쟁을 벌인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살림살이가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을 일부러 조성하는 형국이다.
이런 행태가 이상과 이념에 집착해온 결과라고만 해도 용서받기 어려운데, 실제론 타락한 세속주의까지 결합됐다. 정권 재창출 욕심, 좌파권력의 떡고물을 더 누리려는 탐욕 등이 몽상으로 변한 이상주의와 화학적 결합을 한 것이다.
검찰, 경찰, 군, 관료 등 모든 물리력 행사 기관을 사냥개와 애완견으로 만드는 것도 그런 탐욕의 산물이다. 가차 없는 인사 조치를 가해 공직자들에게 대통령과 같은 색의 선글라스를 끼고 사물을 봐야만 생존할 수 있음을 깨닫게 했다.
일단 같은 색 선글라스를 끼고 나면 양심의 갈등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보와 의견을 진영 내에서만 자급자족한다. 코드언론사와 진영 내 ‘괴벨스’들이 만들어내는 뉴스와 논평만 소비하고, 문빠들이 생산해내는 댓글을 민심으로 간주하며 힘을 얻는다.
한때의 이상주의는 몽상으로 변질된 지 오래건만 스스로는 깨어있는 진보 지식인으로 착각하며 세상을 질타한다. 비극은 최순실 박근혜 코로나 같은 돌출적 사건들이 그런 편집증적 몽상가들에게 국가권력이라는 칼을 쥐여줬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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