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시인이 그의 인스타그램에 자살을 암시하는 글을 남겼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서울 반포와 강 건너 용산 언저리를 떠돌면서, 다리에도 올라가 보고 종로 어디 건물에도 올라가 봤다가 ‘누군가 흉물을 치워야 하겠구나, 그게 평생의 상처로 남겠구나’라는 생각에 그만뒀다고 한다.
그 시인은 2016년 ‘미투’를 당했다. 의혹, 논란이라는 제목을 달고 각종 보도가 쏟아졌다. 사람들은 그에게 죄인이라며 손가락질을 했다. 법관이 그에게 죄인이라 판결한 적 없었지만 그는 이미 죄인이 되어 버렸고 그동안 쌓아왔던 것을 잃었다. 시간이 흘러 수사기관은 그에게 무혐의 처분을 했고, 피해자라고 주장한 자는 무고 및 허위사실 유포 행위로 처벌을 받았다.
그는 불같이 성난 군중에게 논란과 의혹이라는 기름을 부어댔던 기자와 언론사를 상대로 정정보도 및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고 승소했다. 그 정정보도를 받는 데까지 23개월이 걸렸지만 2019년 1월 30일 올라온 정정보도문은 1045자에 불과했고, 사과나 사죄의 말은 한 줄도 없었다. 각종 작가회의, 시회(詩會)는 그를 제명했고, 출판사는 그의 시집을 일방적으로 출고 정지 처분하고 계약을 해지했다. 죄인이 아니라는 판단이 내려졌지만 그는 아무런 후속 조치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나는 변호사로서 성범죄, 성폭력이 한 인간을 어떻게 망가뜨려 놓는지 알고 있고, 아내와 딸을 가진 인간으로서 그것이 얼마나 죄질이 나쁘고 더러운 범죄인지도 잘 알고 있다. 성범죄자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다.
그러나 성범죄자를 미워하고 증오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유죄가 확정된 다음이다. 과거 우리 사회는 멀쩡한 시민을 불온단체 회원, 간첩이라고 하여 죄인으로 만들었던 전력이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 또는 아버지 어머니 세대는 당신들의 목숨과 피, 눈물로 무죄 추정의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를 만들었다. 우리에게는 법관의 유죄 확정 전까지 한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 권한이 없고, 선배 세대가 이룩해놓은 훌륭한 사회적 가치를 합당한 이유 없이 망가뜨릴 권리가 없다.
‘판사유감’이라는 책에는 ‘파산한 기업은 청산되어 소멸하지만 파산한 인간은 계속 살아가야 합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앞서 언급한 시인은 죄인으로 거짓 낙인찍혀 사회적 파산 선고를 받았지만 청산되어 소멸할 수 없는 인간이기에 모진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쓰러진 인간에게는 무덤 대신 두 번째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심지어 쓰러진 이유가 우리 사회의 누명 때문이었다면 우리 사회는 최소한 그에게 죄인이라는 거짓 낙인을 찍기 전의 삶을 돌려줘야 한다. 나는 그가 세상의 아름다운 단어를 수집하고, 인생의 풍경을 그리며, 독자들에게 삶의 지혜를 선사하는 시인의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라고, 이로써 우리 사회가 최소한이나마 정의가 구현되는 세상이라는 점을 증명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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