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후반 피렌체에서 활동했던 도메니코 기를란다요는 당대 최고의 벽화 화가이자 사실적인 초상화의 대가였다. 지금은 미켈란젤로의 스승으로 더 유명하지만, 생전에는 피렌체 귀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최고 인기 화가였다. 그의 대표작은 의외로 노인과 아이를 그린 이중 초상화다.
그림 속 백발노인은 창가에 앉아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있다. 붉은 옷을 입은 노인과 같은 색의 모자를 쓴 아이는 할아버지와 손자 관계로 보인다. 정확한 신원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들의 차림새로 미루어 볼 때 피렌체의 귀족임이 틀림없다. 초상화는 보통 모델의 결점은 감추고 실제보다 미화해서 그려지기 마련인데, 이 그림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노인의 이마에 난 사마귀와 흉한 딸기코가 도드라지게 묘사돼 있다. 울퉁불퉁한 코는 술을 많이 마신 데서 기인한 주사비(코끝이 빨갛게 되는 증상)이거나 질병으로 변형됐을 것이다. 아이는 그런 할아버지를 두려워하거나 혐오스러워하기는커녕 온전히 믿고 의지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다. 온화한 미소를 띤 노인 역시 애정 어린 시선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 두 사람의 강한 유대감과 정서적 교감이 느껴지는 따뜻한 초상화다.
기를란다요는 모델의 부나 권력,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는 장치를 하나도 그려 넣지 않았다. 복장도 화려하지 않다. 손자와 교감하는 활력 있고 애정 넘치는 할아버지를 그렸을 뿐이다. 비록 늙었고 결점도 있지만 노인은 무척 평온하고 행복해 보인다. 아마도 이는 그림의 주문자가 원했던 이미지였을 테다. 오른쪽 창밖에는 두 개의 대비되는 산이 보인다. 앞산은 푸른 나무가 풍성하지만 뒷산은 황량하다.
어쩌면 그림 속 아이는 어린 시절의 노인 자신일지도 모른다. 모든 어른은 아이였고, 아이는 언젠가 노인이 된다. 화가는 창밖으로 난 길을 통해 인생의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당신은 지금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가? 풍성한 산인가 황량한 산인가? 그 길의 끝에 섰을 때, 이 노인만큼 행복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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