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3년을 넘긴 신생 은행 몸값이 국내 4대 금융지주회사보다 높다고 한다면 예전엔 웃어넘겼을 것이다. 요즘엔 그랬다간 물정 모른다는 소릴 듣는다. 2017년 카카오가 세운 인터넷 전문은행 카카오뱅크가 최근 유상증자로 7500억 원을 조달한다고 했더니 돈을 대겠다는 투자자들이 주당 2만3500원을 쳐서 지분을 사기로 했다. 내년 상장을 추진하는 이 은행의 지분가치를 약 8조5800억 원으로 평가한 것이다. 국내 4대 금융지주 시가총액과 비교하면 하나금융(9조 원대)에 근접하고 우리금융(6조 원대)보다 높다.
이런 일은 세계 도처에서 일어난다. 중국의 빅테크(거대 기술기업)인 알리바바가 설립한 금융자회사 앤트파이낸셜은 다음 달 중국 상하이와 홍콩 증시 동시 상장을 추진한다. 이 회사의 기업공개(IPO) 규모는 약 345억 달러로 세계 최대 공모가 될 것으로 보인다. 상장에 성공하면 시가총액은 3130억 달러로 미국 최대 은행인 JP모건체이스(3163억 달러)와 맞먹는다.
빅테크가 금융시장으로 몰려들면 기존 금융사와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29일 열린 제2회 동아 뉴센테니얼포럼 기조연사로 나선 타일러 카우언 미국 조지메이슨대 교수는 “서로 영역을 확대하다가 충돌하면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며 ‘규제 전쟁’을 예고했다. 박관수 캐롯손해보험 뉴비즈앤서비스 부문장도 “2000년대 유통회사와 충돌하던 전자상거래 시장 상황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빅테크가 더 편리하고 저렴하며 안전한 금융 서비스를 내놓는다면 소비자들은 환영할 것이다. 규제로 막을 이유도 없다. 하지만 개방과 공유의 공간인 인터넷과 모바일 혁명 덕분에 성장하고도 덩치가 커진 뒤엔 다른 경쟁자가 진입하지 못하게 문을 닫아걸고 통행세나 다름없는 수수료를 거두는 철옹성을 쌓는다면 혁신이라고 할 수 없다. 미국 정부는 구글을 시장 지배력을 악용해 경쟁자들을 배제하고 소비자 선택권을 침해한다며 반독점 위반 혐의로 제소했다. 제프리 로즌 미 법무부 부장관은 “정부가 반독점법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차세대 혁신의 물결을 잃을 것이고 미국인들은 ‘차세대 구글’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빅테크가 소비자들의 정보를 끌어모아 만든 플랫폼은 한곳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편리함을 주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공짜는 아니다. 공짜 플랫폼을 열고 소비자를 모은 뒤에 플랫폼을 이용하려는 금융사 등에서 수수료를 받는 식의 양면 전략을 구사한다. 결국 소비자들이 어딘가에서 비용을 부담하는 구조라면 독과점 플랫폼에 따른 소비자 이익의 훼손이 일어날 수 있다고 봐야 한다.
한국의 빅테크 네이버가 세운 금융자회사인 네이버파이낸셜은 기존 금융사와 제휴하는 형태로 금융시장에 우회 진출했다. 실상은 ‘네이버 통장’처럼 증권사 종합자산관리계좌(CMA)를 연결해 주거나 플랫폼에 입점한 온라인 상인들에게 금융사 대출을 알선하는 일종의 금융 중개 서비스다. 문제는 편리함을 미끼로 지나친 수수료를 요구할 때 발생한다. 수수료 받아가는 거간꾼이 하나 더 늘어나게 된다. 네이버는 보험시장 진출을 추진하다가 이 문제로 발목을 잡혔다. 보험사들은 전화마케팅 수수료(5∼10%)보다 높은 건당 11%의 수수료를 줘야 할지 모른다고 반발한다. 이 비용은 소비자에게 전가된다. ‘의자 뺏기’와 같은 수수료 싸움을 혁신이라고 부를 순 없을 것이다.
금융 관료들이 요즘 ‘성을 쌓는 자는 쇠할 것이고, 길을 뚫는 자는 흥할 것’이라는 유목민의 격언을 자주 얘기한다. 혁신은 기술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소비자에게 편익을 가져다주는 길을 개척하느냐로 판단해야 한다. 빅테크가 정말로 새 길을 뚫고자 한다면 소비자 편에 서는 개방과 공유의 ‘인터넷 초심’으로 되돌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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