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국내에서 과로로 숨진 노동자 수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는 현실과 괴리가 큰 숫자라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는 훨씬 많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원인이 있다. 우선 현재 정부가 공식적으로 내놓는 과로사 통계가 없다는 게 걸림돌이다. 과로사가 의학적으로 규정된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뇌심혈관계 질환으로 사망한 노동자 중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업재해로 인정받은 경우에만 과로사로 판단하는 것도 차이를 키우는 요인이다. 이는 과로와 사망의 인과관계가 불분명한 데서 비롯됐다. 뇌심혈관계 질환으로 사망한 경우 원인이 고혈압 등 기저질환인지, 과도한 업무부담 때문인지 규명하기가 쉽지 않다. 이 때문에 뇌심혈관계 질환 사망자의 산업재해 승인율은 40%(2019년 기준) 수준에 머물고 있다.
최근 택배노동자 사망 사고가 잇따르면서 과로사가 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올 들어서만 택배노동자 15명이 과로로 숨지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택배 분류 작업까지 떠맡아 하루 14시간씩 근무해야 하는 열악한 업무 환경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사망한 근로자 대다수는 ‘산재보험 적용 제외’ 신청자가 아니었다. 산재 신청을 할 수 있다는 뜻이지만 이들이 모두 산재로 인정받을지는 불투명하다. 택배노동자를 포함한 특수형태 근로종사자(특수근로자)는 보험료 부담 등을 이유로 산재보험 적용 제외 신청을 하는 경우가 적잖다. 실제로 지난해 7월 기준 택배노동자의 산재 가입률은 약 36%에 불과했다.
○ ‘업무시간’에 치우친 과로사 판정
2018년 7월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면서 한국도 ‘과로 사회’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과로사는 오히려 증가 추세다. 산업재해 승인을 받은 뇌심혈관계 질환 사망자는 2016년 300명에서 지난해 503명으로 67.7% 급증했다. 이 기간 산재 승인율이 26%에서 39.1%로 높아진 영향도 있다. 하지만 같은 기간 신청 건수도 29.5% 늘었다. 과로 부담이 크게 줄어들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과로사의 산재 승인율이 높아진 것은 2018년부터 정부가 과로사 인정 기준을 완화한 게 컸다. ‘만성 과로’의 경우 기존에는 발병 전 12주 동안 업무시간이 1주일 평균 60시간 초과하는 경우 업무와 질병의 연관성이 크다고 봤다. 개정된 고시에서는 기준 시간(52시간)을 추가하고, 업무 부담이 가중될 수 있는 조건을 추가했다. 또 과로 시간을 산출할 때 야간근무는 주간근무 시간의 30%를 가산하도록 했다.
하지만 여전히 산재 보상에서 제외되는 억울한 죽음이 적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과로사 판단 기준이 업무 시간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업무 강도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으로 인색하다는 점이다. 이를 이용해 적잖은 기업들이 “근무 시간이 이렇게 짧은데 어떻게 과로사일 수 있냐”며 사망 원인을 근로자의 기저질환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한양대 산학협력단이 지난해 고용부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부터 지난해 상반기까지 뇌심혈관계 질환 산재 신청자 중 주당 40∼52시간 근무자(발병 전 12주 기준) 승인율은 22.6%에 그쳤다. 주 52∼60시간일 때는 65%, 60∼80시간일 때는 약 90%가 산재로 인정됐다. 김인아 한양대 의대 작업의학교실 교수는 “근로 시간이 짧다고 반드시 노동 강도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며 “택배노동자처럼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업무 부담을 과로로 인정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 과로사 입증 책임은 유족에게
근무 시간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산재 인정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회사 밖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은 출퇴근 시간이 명확하지 않아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 보험설계사나 영업사원 등이 대표적이다. 정해진 시간 없이 고객을 만나지만 이를 근무 시간으로 인정받기 쉽지 않다. 최근 재택근무가 늘어나면서 업무와 집안일 사이의 경계가 애매해진 것도 향후 과로사 산재 인정 과정에서 논란이 될 가능성이 크다.
주 52시간을 맞추려 회사에서는 퇴근하고, 업무를 집에서 처리하는 직장인도 산재를 인정받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출퇴근 기록만으로는 과로 인정 기준을 충족하지 못할 수 있어서다. 실제로 2018년∼2019년 6월 직군별 과로사 산재 승인율은 사무직이 22.9%로 서비스(44.0%), 단순노무(41.6%) 등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법무법인 마중 김용준 변호사는 “영세한 사업장일수록 근무 시간 관리가 허술하다”며 “이를 공개할 의무도 없다 보니 과로를 입증할 근거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당사자가 죽고 나면 과로를 입증할 의무는 유족의 몫이다. 문제는 입증할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업무 기록이 저장된 컴퓨터를 회사에 반납했거나, 휴대전화도 보관하지 않았을 땐 과로를 증명할 자료조차 확보하기 어렵다. 노무법인 소명 박영일 노무사는 “회사에 증거 제출을 요구해도 분실이나 자료 손상을 이유로 거절하는 경우가 많다”며 “증거 부족으로 산재 신청을 포기하는 유족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 ‘업무 부담’ 판단 기준 세분화돼야
과로사가 산재로 인정받으려면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의 심사를 거쳐야 한다. 사건의 70%가량은 전체 합의로 승인 여부를 결정하고,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으면 표결로 결정하는 구조다. 하지만 질병판정위원회의 판정 기준이 지나치게 경직돼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업무 형태와 근로 계약이 복잡해지면서 과로 유발 요인이 다양해졌는데, 이런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질병판정위원회는 산재가 아니라고 판단한 과로사를 유족이 소송을 통해 뒤집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2017년 과로로 숨진 택시운전사 A 씨에 대해 질병판정위원회는 오랜 기간 야간근무를 했기에 업무 부담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고지혈증 등 기저질환이 있어 과로가 직접적인 사인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법원은 “야간운전은 주간보다 피로감이 크고, 원고의 업무 형태가 질환을 유발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유족 측의 손을 들어줬다.
전국 6개 질병판정위원회의 과로사 산재 승인율 편차가 큰 것도 문제다. 2018년부터 지난해 6월까지 과로사 산재 승인율은 서울이 47.9%로 가장 높았고, 광주는 34.9%로 차이가 컸다. 질병판정위원회에 참여했던 한 노무사는 “근로복지공단 안에서도 지역별, 성별 승인율 차이가 큰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업무 시간뿐 아니라 업무 강도나 스트레스를 사망의 원인으로 평가할 수 있는 질적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현재 업무 부담 가중 요인으로 인정받는 경우는 △휴일 부족 △유해한 작업 환경(한랭, 온도 변화, 소음 등) △근무 일정 예측이 어려운 업무 △교대제 △시차가 큰 출장이 잦은 업무 △정신적 긴장이 큰 업무 등이다.
이 기준에만 맞추다 보니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업무 환경은 과로 조건으로 평가하지 않는 경향도 나타난다. 유해 환경 기준을 확대해 폭염이나 미세먼지 발생 등을 추가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김인아 교수는 “각 직종의 업무 특성에 맞춰 과로 평가 기준을 세분해야 한다”며 “택시운전사는 1시간 미만의 식사 시간을 근로업무 시간에 포함하고, 현재 5시간 이상으로 된 시차 기준도 3, 4시간으로 줄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과로사 방지법’ 탄력 받을까
과로사는 동아시아 일부 국가에만 존재하는 개념이다. 영어권에는 이에 해당하는 단어 자체가 없다. 기껏해야 ‘워커홀릭(일중독자)’ 정도다. 죽음에 이를 때까지 일한다는 것이 노동자의 건강권을 중요시하는 서구권에서는 익숙한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2002년 영국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과로사를 뜻하는 일본어 ‘가로시(karoshi·過勞死)’가 등재되기도 했다.
과로사뿐 아니라 ‘과로 자살’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된 일본은 최근 과로사 방지법을 도입해 근로 환경 개선에 적극 나서고 있다. 근로 시간을 줄이는 노력뿐 아니라 노동권 교육 등도 포함하고 있다. 한국도 여당을 중심으로 과로사 방지법 제정 필요성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장시간 노동에 내몰린 택배노동자 등 특수근로자의 적정 업무 시간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다. 하지만 경영계 등에선 “근로 시간에 대한 과도한 규제”라며 반발하고 있어 과로사 방지법 도입까지 적잖은 난항이 예상된다.
과로사의 산재 승인율을 높이는 것만큼 과로사 자체가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 노동 시간을 줄이는 것이 급선무다. 하지만 한국의 노동 시간은 여전히 세계 최상위권이다. 국제노동기구(ILO)가 지난해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주당 48시간 이상 근로자’는 45%로 터키(57%)에 이어 2위로 나타났다. 이는 유럽연합(EU) 내 28개국과 미국, 중국 등 41개국을 비교한 결과다.
‘아파도 일한다’가 아니라 ‘아프면 쉰다’가 새로운 근로 기준이 되도록 제도적 뒷받침도 필요하다. 아파서 쉬어도 최소한의 생계가 유지돼야 과로사까지 내몰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정연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규모가 큰 사업장에서만 기대할 수 있는 유급휴가를 확대하고, 상병수당을 도입해 노동자의 건강권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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