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대법원 판결과 지난해 여름 수출규제 등을 거치며 증폭된 갈등 탓일까. 근래의 한일 관계에는 흔히 ‘해방 이래 최악’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지난해 12월 도미타 코지(冨田浩司) 주한 일본대사는 부임 일성으로 “양국 간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지만 양국 관계는 줄곧 어두운 터널 속에 머물러 왔다. 이런 가운데 9월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 취임을 계기로 양국 간에도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가 조금씩 감지된다. 한일 외교의 최전선에 선 도미타 대사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현직 외교관이기에 갖는 발언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는 ‘긴 안목’과 ‘인내’를 강조하며 낙관적 미래를 내다봤다. 인터뷰는 지난달 30일 서울 성북구 일본대사관저에서 이뤄졌다. 부임 후 중앙일간지와 가진 첫 인터뷰다.》
“한일 관계, 긴 안목으로 보면…”
“한일 관계가 나쁘다, 어렵다고들 하지만 긴 안목에서 보자면 1965년 국교 정상화로부터 ‘불과’ 50여 년 사이에 여기까지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낙관주의를 가질 만하죠. 반면 한일 간에는 역사적 경위가 있어 무언가를 진전시키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전후 국교 정상화에만 20년, 그로부터 김대중-오부치 파트너십 선언(1998년)까지 30여 년이 걸렸습니다. 인내심이 필요한 거죠. 물론 낙관주의는 낙천주의와 달라서, 눈앞의 과제를 해결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요구합니다.”
―한국에서는 스가 총리 취임을 계기로 양국 관계 개선의 기대가 있었다.
“새 정권 출범을 계기로 관계 개선의 기운이 생겨나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다. 스가 총리는 스스로 외교에서 아베 신조 노선을 계승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한국과 일본이 서로 중요한 나라라는 점, 그리고 이 지역 안정을 위해 일한·일미한 연대가 중요하다는 기본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 한국 측이 정권 출범 직후 전화회담을 요청한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외교의 과제는 이런 긍정적 기운을 관계 개선을 향한 구체적인 움직임으로 바꿔 나가는 일이다.”
―올 연말경으로 예상되는 한중일 정상회담에서 한일 정상이 만난다면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일본 측이 스가 총리 방한 조건으로 징용 피해자 배상 소송과 관련한 한국 정부의 선조치를 요구하고 있다는 말이 흘러나온다.
“일한중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일정이 나온 게 아니니 일반론만 말할 수 있다. 우선 스가 총리와 문재인 대통령이 개인적 관계를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동시에 정상들이 만났을 때 국민이 기대할 만한 성과를 낼 필요도 있다. 그에 어울리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외교적 대화를 계속하고 있다. 며칠 전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이 방한한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여러 가능성에 대해 다각도로 모색 중이다.”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는 실타래가 너무 꼬였다는 지적이 많다.
“이런 상황을 풀기 위해 대화가 필요한 것이다. 낙관주의는 문제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자세다. 무엇보다 이 문제가 잘못될 경우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위기감, 그런 사태를 피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양국 정부가 공유한다고 생각한다.”
한일 정상, 개인적 관계 만들어야
―또 하나의 현안으로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처리수 문제가 있다.
“후쿠시마 제1원전의 폐로 과정에서 언젠가는 피해갈 수 없는 문제인 것으로 안다. 다만 폐수 처리의 모든 과정은 국제적 기준을 준수하며 국제원자력기구(IAEA) 등의 승인과 협력하에 이뤄지게 된다.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와도 긴밀히 연락하고 투명성을 가지고 임한다는 각오다.”
―코로나19 문제와 관련해 그간 한일 간 협력이 몇 가지 성과로 나타났다. 제3국에서의 자국민 대피 과정에서의 협력, 일본계 기업인 도레이 구미 공장의 마스크 소재 생산 협력 등이 그런 예다. 좀 더 서로 도울 여지는 없을까.
“방역은 국가마다 사정이 다르다는 점에서 국제협력에 제약이 있지만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내다본다면 여러 가능성이 생긴다. 가령 스가 총리는 포스트 코로나를 겨냥해 디지털 이노베이션에 투자하겠다고 하는데, 문 대통령이 내건 한국판 뉴딜 정책과 공통점이 많다.”
―3월 이래 멈췄던 한일 간 인적 교류가 최근 기업인부터 풀렸다. 코로나 확산 여하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우문이긴 하지만 일반인 왕래는 언제쯤 풀릴 것으로 예상하나.
“비즈니스 트랙 외의 폭넓은 구조를 준비하고 있다. 특히 올림픽과 방역을 어떻게 양립시킬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아베 전 정권은 관광입국을 내걸고 민간 경제활동의 상당 부분을 관광업에 투여했다. 지금 국내 관광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외국인 관광도 하루빨리 정상화하길 염원하고 있다.”
―반일 혐한 등 민족주의 감성이 기승을 부리는 반면 젊은이들은 음식이나 문화 등 독자적 감성으로 상대국에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젊은이들은 공감을 비교적 순수하게 표현하니까. 사실 서로에 대한 친근감은 다른 세대들도 가졌다고 본다. 한국 드라마가 일본에서 인기 있는 이유도 공감이 되기 때문이다. 연애 감정, 가족의 소중함…. 느끼는 것이 비슷하다. 저도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을 시종 흥미진진하게 봤고 최종회에서는 울었다. 교류를 통해 이런 공감대를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
처칠-대처 전기 저술 위기 리더십 연구
그는 현역 외교관으로서 윈스턴 처칠과 마거릿 대처에 대한 저서를 낸 작가이기도 하다. 이 중 대처 전기는 지난해 일본의 권위 있는 출판상인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상을 받았다. 미디어에 보도되지 않은 사실들을 일일이 찾아내 공들인 저술이다.
―왜 처칠과 대처인가.
“정치 지도자의 역할은 크게 자원 배분과 국가 위기에 대한 대처, 이 두 가지라고 본다. 처칠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국가적 위기 앞에서 역사에 남을 궤적을 남겼다. 대처는 대처리즘으로 불리는 변혁을 통해 정치적 ‘자원 배분’을 새로이 해 영국병을 치유하고 영국 경제를 부활시켰다. 인간적인 그릇은 처칠이 더 크고 매력적이지만 영국 사회에 미친 업적은 대처가 더 컸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처칠이나 대처의 시대만 해도 리더의 역할이 크고 대중에게 리더십이 받아들여졌다. 요즘은 자국제일주의가 우선시되면서 포퓰리즘과 독재가 뒤섞인 리더십이 세계를 풍미한다.
“리더는 국가를 이끌지만 국민에게 이끌려가기도 한다. 한 시대는 지도자와 국민의 상호 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리더를 고르는 것은 국민이므로 국민의 현명한 판단이 중요해진다.”
그는 “현직 외교관으로서 현실 정치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더 이상의 말을 아꼈다. 하지만 그의 저서를 펼쳐보면 어느 정도 답이 나와 있다. “민주주의하에서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리더는 국민에 영합하게 된다. 세상이 복잡 다양해지면서 정당들은 모두 중도로 수렴돼 차별성이 없어졌다. 불만이 쌓인 국민에게 리더들은 극단적인 주장으로 대중의 공감을 얻고 정치의 권좌를 차지하는 수법을 쓰게 된다….”
한일축제한마당… “계속의 힘”
그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 이래 20번째 주한 일본대사다. 2004∼2006년 주한 일본대사관 참사관과 정무공사로 근무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는 가족이 함께 서울에서 지냈지만 이번에는 혼자다. 자녀들은 이미 장성했고 부인은 지난해 태어난 첫 손자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다고 한다.
―한국에서 내정 단계부터 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1925∼1970)의 사위로 소개되면서 경계의 대상처럼 인식돼 버렸다. ‘금각사’의 작가로 한때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던 미시마는 점차 극우 사상에 경도돼 자위대의 궐기를 외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남겨진 딸은 11세에 불과했다.
“장인은 아내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제 직업이나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밝혀둔다.”
10일에는 제16회 한일축제한마당이 온라인으로 개최된다. 주한 일본대사관은 코로나로 인해 거리 두기 단계가 높아지는 가운데서도 5월부터 축제 준비를 위한 실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수차례 회의를 거듭했다. 도미타 대사는 그때마다 “계속(繼續)은 힘(力)이 된다”는 일본의 격언을 강조하며 어떤 형식으로건 축제를 지키겠다는 뜻을 밝혔다. ‘계속은 힘…’은 당장 화려하고 눈에 띄지 않더라도 해오던 것을 꾸준히 이어가는 정신을 말한다.
“축제한마당은 제가 서울서 근무하던 2005년 ‘한일 우정의 해’ 기념사업으로 시작돼 15년간 이어온 행사다. 코로나 때문에 고민이 많았지만 계속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온라인이라 한계가 있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참가 못 하던 분들이 찾아줄지도 모른다. 되도록 많은 분이 관심 갖고 즐겨 주시길 기대한다.”
소소한 일이라도 꾸준히 계속해 나가다 보면 무언가를 이룰 힘을 얻는다. 향후 한일 관계 여러 장면에서 이런 정신은 꾸준히 지켜져야 할 것이다.
도미타 코지 주한 일본대사
―1957년 후쿠오카 출신. 도쿄대 법학부 졸업. 1981년 외무성 입성, 주영 공사, 주미대사관 차석공사, 북미국장, 주이스라엘 대사를 거쳐 현직 ―저서: ‘마거릿 대처-정치를 바꾼 철의 여인’(2018년), ‘위기의 지도자 처칠’(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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