稅制 파괴자들[오늘과 내일/고기정]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1월 9일 03시 00분


재산세 인하 논란에 가려진 과세형평 훼손
조세를 징벌로 만들어버린 국회의 세금정치

고기정 경제부장
고기정 경제부장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부가가치세 인상을 검토할 때라는 보고서를 최근 내놓았다. 요지는 저출산 고령화로 재정 지출은 늘어나지만 세수는 줄기 때문에 부가가치세율을 현재의 10%에서 12%로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현행 세율을 고수하면 2050년 부가가치세 수입이 지금보다 20%(약 10조 원) 줄어들 것으로 추산했다. 이 때문에 2%포인트는 올려야 지금 정도 세수를 유지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부가가치세 기본 세율은 평균 19.3%다.

부가가치세는 박정희 정권 때인 1977년 도입됐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했던 물가가 뛰고 아파트값마저 폭등했다. 이듬해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선전하며 정권이 흔들렸던 것도 증세의 후폭풍과 무관치 않았다. 부가가치세 도입을 주도했던 남덕우 부총리, 김용환 재무부 장관,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이 옷을 벗어야 했다.

이런 부담에도 불구하고 부가가치세 인상이 거론되고 있는 건 그만큼 미래 재정 전망이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보고서가 드러내놓고 지적하진 않았지만 이미 올해 상반기 재정적자는 역대 최대 규모다. 현 정부 들어 급증한 경직성 복지예산에 더해 총선을 앞두고 푼 재난지원금 등의 영향이 컸다. 그럼에도 코로나 사태로 적극 재정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내년 예산도 초(超)슈퍼급으로 짰다. 정부는 재정이 건전하다고 하지만 그건 ‘아직까지는’이라는 전제에서다. 이 추세라면 국가채무비율이 유럽 수준으로 높아지는 건 시간 문제라는 경고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재정의 고삐가 이미 풀려버린 탓에 앞으로 정부지출을 조이기는 매우 어려워졌다. 그렇다면 관건은 세원이다. 부가가치세든 뭐든 나라 곳간을 채워 넣을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증세는 누구에게나 고통스럽다. 이 때문에 누구나 세 부담을 져야 한다는 과세형평의 원칙을 도입했고, 이를 실현하고 강제하라고 만들어 놓은 기구가 의회다. 하지만 여당이 최근 재산세와 주식 양도소득세를 처리한 과정과 결과는 실망스럽다.

이번에 논란이 된 공시가격 상향 조정은 여권이 계승했다는 노무현 정부에서 로드맵이 나온 사안이다. 당시 공시가격 적용비율을 매년 5%씩 올려 2015년에 시세반영률을 100%로 높이기로 했었다. 그게 늦어져 이번에 수정안이 나온 건데, 여당은 그나마 내년 재·보궐선거에서 이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 특정 가격 이하 주택에는 아예 재산세율을 낮춰 공시가격이 올라도 세금이 늘지 않게 해야 한다고 정부를 압박했다. 애당초 보유세로 집값을 잡겠다거나, 외국보다 낮은 보유세를 정상화해야 한다는 건 정치적 수사였을 뿐 결국엔 국민을 갈라 쳐 표심을 잡으려 했던 게 재확인됐다. 재산세 인하 기준을 공시가격 6억 원으로 할지, 9억 원으로 할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과세형평이 무너지면 누군가에겐 세금이 징벌이 된다.

주식 대주주 양도세 부과 계획이 틀어진 것도 세제를 ‘표퓰리즘’에 동원한 결과다. 유독 증권투자 수익에만 양도세를 면제했던 건 과거에 국가가 과소자본 상태였기 때문이다. 직접금융시장을 키워 민간 자금을 끌어 모으려는 조치였지만 과세형평에는 어긋났다. 이걸 바로잡자는 건데, 여당은 10억 원 이상 대주주만 양도세를 물리는 현행 규정을 유지하기로 했다. 회사를 창업해 본인 지분이 10억 원 이상이든, 시장에서 주식을 매수해 지분이 10억 원을 넘었든 상관없이 10억 원 넘게 주식을 갖고 있으면 무조건 차별적인 세금을 무는 기형적인 세제가 계속되는 것이다.

근대국가의 원형은 세금을 둘러싼 투쟁에 기초한다. 의회의 존재 이유는 세제에 있다. 지금 국회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세제를 파괴하고 있다.

고기정 경제부장 koh@donga.com
#재산세#인하#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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