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스토리다.”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중
14년째 나는 문학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작가의 원고를 받아 문장을 다듬고 제목과 표지를 입혀 물성을 가진 한 권의 책으로 만드는 일을 한다. 내 삶과 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된 지 오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날에도 내가 만든 새 책이 출간되었다. 무수한 가능성을 품은 채 내 손에 들린 이 책이, 모쪼록 오래오래 사랑받기를 바란다.
여기, 나와의 대척점에 선 채 손에 쥔 책을 내려다보는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한탸, 폐지 압축공이다. 내 일이 책을 시작하는 거라면 그의 일은 책을 끝내는 것. 그는 쥐 떼가 들끓는 지하실에서 맨손으로 압축기를 다룬다. 천장에 달린 뚜껑 문으로 매일 끊임없이 폐지가 쏟아진다. 괴테와 니체의 작품들이, 더는 구하기 어려운 희귀본들이, 쓸모를 다한 혹은 한 번도 읽히지 않은 책들이 그의 손에서 신속하게 압축된다. 그 노동의 과정에서 한탸는 지식을 쌓고 지혜를 얻는다. 지하에 고립된 채 지상의 세계를 읽는 현자가 된 것이다.
한탸의 자리를 거대하고 편리한 기계가 대신하는 것은 근대의 종말, 인간 소외 같은 말로 쉽게 표현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가 결국 압축기로 걸어 들어감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끝냄과 동시에 완성하는 결말은 숭고하다는 말로도 부족해 보인다. 그저 소설이 그려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결말을 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읽어보라고 말할 수밖에. 이 소설은 국내 소설가 50명이 ‘올해의 소설’(2016년) 1위로 뽑은 작품이며, 작가인 보후밀 흐라발은 ‘체코 소설의 슬픈 왕’이라 불린다. 자신의 작품을 금서로 정한 고국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끝내 지키고자 했던 세계에 투신한 한탸처럼 말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