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투표율-첫 여성 부통령 의미 크지만
트럼프 현상 만든 불평등 사회구조 여전
‘샤이 트럼프’ 부각에 양극화 심화될 수도
치유의 시작 아닌 갈등의 시작 될까 우려
미국 대선의 후폭풍이 거세다. 국내외 주요 언론은 조 바이든의 당선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으나 아직 공식적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다. 관행상 이 정도 상황이 되면 상대는 패배를 시인하고 당선인을 축하하며 선거가 마무리되었지만, 이번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승복은커녕 광범위한 소송을 예고하고 있고 일부 주에선 재검표를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선거 결과가 뒤바뀔 가능성은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인 선거인단 마감일인 12월 8일까지 크고 작은 혼란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당선자로서의 행보를 시작한 바이든이 ‘지금은 치유의 시간’이고 ‘통합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지만 선거 결과는 치유의 시작이 아닌 더 깊은 갈등의 시작이 될까 우려된다.
트럼프의 선거 결과 불복과 소송으로 혼란이 가중되고 있으나 공화당 지도부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바이든이 정말 미국의 통합을 원한다면 20년 전 앨 고어 민주당 후보가 플로리다주 개표를 놓고 한 달여간 법적 소송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던 것처럼, 현재 진행 중인 소송 절차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야 바이든 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화당 지도부가 나서서 ‘이제 그만하고 미국을 위해 승복합시다’라고 말할 수 있을지에 향후 정국의 흐름이 좌우될 것이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위협을 받을 때마다 이를 극복했던 당 지도부의 ‘가드레일’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더 큰 문제는 트럼프가 선거에서 패배하더라도 ‘트럼프 현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경제적 불평등, 이민 문제, 인종 갈등 등 트럼프를 정치판으로 불러온 사회구조적 요인은 여전히 남아있으며 7000만 표를 모은 트럼프의 저력도 무시하기 어렵다. 사실 현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예측한 것은 언론도 전문가그룹도 아닌 트럼프 본인이었다. 현장 투표 중심의 선거 당일 개표에서는 자신이 이길 것이지만 문제투성이인 우편투표로 인해 승리를 뺏기게 될 것이라고 수개월 전부터 주장하며 선거 불복을 예고했다. 트럼프는 ‘대통령을 결정하는 것은 합법적 투표이지 뉴스미디어가 아니다’라며 바이든 당선을 기정사실화하는 언론을 비판하고 있으며, 2024년 대선 재출마론도 나오고 있다.
한편 반(反)트럼프 연합전선의 선봉으로 나선 바이든은 상원의원으로 37년, 부통령으로 8년간 재직했다. 경험이 풍부한 노련한 정치인이다. 주위엔 풍부한 인재풀도 존재한다. 트럼프식 분열정치에 대한 피로감에 더해, 팬데믹과 경제침체로 인해 트럼프의 현직 프리미엄을 상쇄하고도 남을 유리한 선거환경이 조성됐고, 주류 언론과 전문가그룹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 말리는 접전 끝에 가까스로 신승했다. 그가 고전한 가장 큰 이유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은 리더라기보다는 ‘올드 보이’로서의 이미지가 강했고, 자신만의 뚜렷한 어젠다를 제시하기보다는 반트럼프 정서라는 반사이익에 기댄 측면이 컸기 때문이다. 4년 전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최선은 아니더라도 최악은 피해야 한다’는 절박한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은 것이다.
바이든에게는 트럼프 현상의 기반이 된 백인우월주의를 넘어서면서 동시에 이들을 포용해야 하는 난제가 놓여 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경쟁자였던 힐러리 클린턴을 초대 국무장관에 임명했던 것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탕평인사나, 그가 가진 풍부한 정치 경험과 상원 내 인맥을 활용하기를 기대해보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버니 샌더스, 엘리자베스 워런 등 민주당 내 좌파의 압박을 받으며 트럼프를 지지한 우파세력을 포용하는 정책을 만드는 것은 물론 제도적 개혁안을 뒷받침하기도 쉽지 않다. 민주당이 상원을 탈환하는 데 실패했고 하원은 오히려 의석수를 공화당에 내주며, 법인세 인상이나 규제 강화 등 변화를 이뤄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건강보험 확대 등의 개혁안도 6 대 3으로 보수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 대법원으로 인해 여의치 않을 것이다.
이번 선거는 120년 만의 최고 투표율을 보였고, 첫 여성 부통령이자 아시아-아프리카계 부통령 선출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트럼프 현상은 건재하고, 정치적 양극화는 심화되었으며, 미국 사회는 적지 않은 내상을 입었다. ‘샤이 트럼프’는 더 이상 무대 뒤에 숨지 않고 오히려 전면에 나서서 목소리를 낼지도 모른다. 분열과 갈등으로 점철된 트럼프의 미국이 끝났다는 안도감보다도 바이든의 미국 역시 만만찮은 험로를 예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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