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으로 그 어느 때보다 세계의 이목이 워싱턴DC로 모였다. 워싱턴DC의 건축적 관전 포인트는 무엇일까? 첫째는 랑팡 플랜, 둘째는 워싱턴 기념탑, 셋째는 맥밀런 플랜이다.
DC의 밑그림은 1791년 프랑스 건축가 피에르 샤를 랑팡이 그렸다. 그의 건축주는 당시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과 국무장관인 토머스 제퍼슨이었다. 워싱턴은 제국의 수도가 물길을 따라 산업도시로 번영하길 원했고, 이에 반해 제퍼슨은 전원도시로 변화하길 원했다.
랑팡은 워싱턴을 따랐다. 랑팡이 그린 DC 기본 평면 구조는 포토맥 강가에 세운 삼각형이다. 두 꼭짓점에 국회(동쪽)와 백악관(북쪽)을 두었다. 둘을 잇는 펜실베이니아 애비뉴가 빗변이고, 국회 앞 녹지 광장이 밑변이다. DC는 랑팡 플랜에 따라 70년간 서서히 변모했다. 그러다가 남북전쟁이라는 위기가 왔다.
DC는 전쟁으로 인구가 줄었고, 포토맥강은 오염됐으며 전염병이 창궐했다. 제국의 수도는 허울뿐이었고, DC는 남부 소도시로 전락했다. 전후에도 남과 북의 갈등은 계속되어 수도를 미 대륙의 중부로 옮기자는 천도론이 솔솔 나왔다.
하지만 한 사람의 공으로 천도론은 잠잠해졌다. 그는 미 육사 출신 토머스 케이시였다. 그는 전쟁으로 멈춰 있던 워싱턴 기념탑 공사를 끝내라는 임무를 정부로부터 받았다. 공사 중간에 기념탑이 너무 단순하다는 비판과 제안이 일었다. 저층에 울타리 구조물을 넣자는 주장과 인물 조각상을 군데군데 더하자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케이시는 흔들리지 않았다. 끝까지 기념탑의 단순함과 거대함과 웅장함에 집중했다. 기념탑의 무게는 8만 t이었다. 기초 시공은 당대 공법으로는 버거운 일이었다. 1884년 12월 7일 1360kg짜리 피라미드 모양의 머릿돌을 정상에 얹었다.
1885년 조지 워싱턴 생일에 가림막을 벗기자 비판은 사그라들었다. 형태의 단순함은 워싱턴의 극기와 금욕으로 해석되었고, 날카로운 모서리와 백색 얼굴은 빛에 민감히 반응하며 오직 거대한 수정체만이 뿜을 수 있는 추상미를 도시에 선사했다. 이는 국부(國父) 워싱턴의 독립 유지와 헌법수호, 자유보전 정신을 영구히 잊지 말자는 건축 메시지였다.
워싱턴 기념탑 준공에도 DC는 제국의 수도로서 미완이었다. 새 천년을 맞이하며 제임스 맥밀런 상원의원은 새로운 팀을 모았다. 1893년 시카고 세계박람회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대니얼 버넘, 찰스 매킴, 프레더릭 옴스테드 2세, 오거스터스 세인트고든스가 팀 멤버들이었다.
이들은 파리의 루브르궁과 개선문 축이 만드는 도시의 권위와 위용과 아름다움에 압도되었다. 유럽에서 돌아온 맥밀런 팀은 루브르궁 대신에 국회를, 개선문 대신에 링컨 기념관을 잡았고, 그 사이에 기존 랑팡의 잔디 광장을 ‘내셔널 몰’로 늘려 도심 축을 제안했다.
맥밀런 플랜은 랑팡 플랜의 국회, 백악관, 워싱턴 기념탑을 잇는 삼각형 구조를 마름모 구조로 바꾸고, 남은 두 꼭짓점에 링컨 기념관과 제퍼슨 기념관을 제안했다. 이로써 불멸의 랜드마크 5인방이 완성됐다. 맥밀런 팀의 목적의식은 랑팡 플랜을 더욱 완성도 높은 보자르양식(고전주의)의 수도로 격상시키자는 것이었다.
랑팡 플랜과 워싱턴 기념탑과 맥밀런 플랜이 DC에 남긴 건축적 유산은 작지 않다. 건물들은 백색이고, 광장들은 녹색이며, 길들은 사선으로 뻗는다. DC는 순수하고 거대하다. 위엄과 위용이 흐른다. 두 달 뒤면 DC는 새 주인을 맞이한다. DC는 여름보다는 봄가을에 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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