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의 맛[2030 세상/김지영]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1월 17일 03시 00분


김지영 한화생명 라이프플러스랩
김지영 한화생명 라이프플러스랩
언제부턴가 또래들 사이 가장 힙한 문화는 단연 ‘달리기’였다. 관련 인증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도배했고 서점에는 달리기를 찬양하는 책들이 넘쳐났다. 마치 ‘러닝’이라는 신흥 종교가 생긴 것 같았다. 코로나19로 여가에 제약이 생긴 것과 더불어 자기계발을 중시하는 흐름이 반영된 것이리라 짐작만 할 뿐 나와는 다른 세계의 일이라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경우 학창시절부터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것 중 하나가 오래 달리기였다.

자란 다음부터는 좀처럼 뛸 일이 없었다. 운동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달리기를 필요로 하는 운동은 축구나 농구 같은 그룹 스포츠를 제외하고는 생각보다 별로 없었다. 기다리는 시간도 그다지 싫어하지 않아서 횡단보도 불이 깜박거려도, 바로 앞에서 버스가 지나가도, 웬만하면 뛰지 않는 종류의 사람으로 살아왔다. 달리기보다는 걷기의 속도감이 내게는 더 맞았다.

그러던 중 버추얼 마라톤에 참가했다. 재직 중인 회사에서 추진하는 행사이기도 했고 버추얼이라기에 일단 호기심이 일었다. 기록은 앱을 통해 각자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측정하면 되는 것이라 부담도 없었다. 그렇게 어느 주말 저녁, 어차피 하는 산책 기분이나 내보자 하는 마음으로 착장하고 집을 나섰다.

처음부터 뛸 생각은 아니었다. 다분히 ‘러너’스러운 복장 탓인지, 같은 복장을 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지나는 무리들 탓인지 어느 순간부터 뛰기 시작했다. 가을 초저녁의 맑고 찬 공기가 뺨에 와 부딪혔다. 걷기로는 느낄 수 없는 기분 좋은 온도감이었다. 폐 아래까지 공기가 들어차는 느낌이 낯선 듯 반가웠다. 아주 오랫동안 참았던 숨을 한번에 몰아쉬는 것 같았다. 중간중간 숨이 찰 때면 걷기도 했지만 점점 뛰는 게 걷는 것보다 수월해졌다. 처음 익숙해질 때까지는 힘들지만 어느 정도 속도가 몸에 익으면 비로소 편안해지고, 한 번 멈춰 버리면 그 다음은 배로 힘들어지는 것. 달리기란 그런 것이었다.

마침내 10km를 완주하고 집 앞 가게에 들러 맥주 한 병을 거의 원샷 했다. 샤워를 하고 소파에 몸을 묻자 기분 좋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아, 이 맛에 다들 러닝 러닝 하는구나.’ 성인이 된 후 최초의 자발적 달리기였다. 돌아보면 그동안의 달리기는 수업 또는 경기의 일환인 강제적 달리기 혹은 어딘가에 제시간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적 달리기였다. 자발적으로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할 때 싫어했던 것도 놀이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로부터 3주 남짓한 시간 동안 이삼일에 한 번꼴로 나가 뛰었다. 그렇게 내게도 ‘그분’이 오셨다. 러닝이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리라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뒤늦게 알게 된 달리기의 맛. 내게 그것은 싫어했던 것을 좋아하게 되는 맛이기도, 소소한 성취와 성장의 맛이기도, 일상을 단단하게 하고 스스로를 단련하는 맛이기도 하다.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나는 더 이상 달리기를 싫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 어느 날 문득 마음이 축날 때면 나는 내가 길 위에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그런 확신이 든다.

 
김지영 한화생명 라이프플러스랩



#버추얼 마라톤#달리기#런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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