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을 가다]
코로나19 여파 실직으로 월세 밀려… 非백인-저소득층 사회 약자 타격 커
‘한시적 퇴거유예’ 이후 주거난 우려
세입자-집주인-금융사 부실 가능성
2일 미국 뉴욕 맨해튼 남부의 뉴욕시 조사국(DOI) 빌딩. 추운 날씨였지만 마스크를 쓴 시민 50여 명이 아침부터 하나둘씩 모였다. 이들은 ‘월세 거부(Cancel Rent)’, ‘세입자 조합(Tenant Union)’이란 팻말을 들고 건물 로비에서 농성을 벌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 등으로 월세를 내지 못해 강제 퇴거 위기에 몰린 시민들이 이 업무를 담당하는 관청 앞에서 항의 시위에 나선 것이다.
시위대 중 한 명인 흑인 남성 롤랜드 씨는 “강제 퇴거를 멈추고 주거 기본권을 보장해 달라. 경찰이 우리를 해산시킬 때까지 농성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백인 남성 미치 씨 역시 “여기 나온 사람들의 대부분은 전염병 대유행(팬데믹)으로 직장을 잃고 집까지 잃었거나 그럴 위기에 놓인 사람들”이라며 당국이 이 문제를 수수방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브루클린 크라운하이츠 주민이 대부분인 이들은 ‘크라운하이츠 세입자연맹’이란 단체를 만들어 최근 몇 달간 꾸준히 시위를 해오고 있다. 13일에는 워싱턴 정계의 실력자인 야당 민주당의 척 슈머 상원 원내대표(뉴욕)를 찾아가 “팬데믹 기간 중 발생한 모든 월세를 감면해 달라”는 기습 시위를 감행했다.
○ 미납 월세 총 8조 원
#1. 미 중부 미주리주의 한 50대 여성은 코로나19 여파로 기존 주 40시간이었던 근로시간이 절반으로 줄었다. 수입이 급감해 그는 올해 8월 이미 수백 달러의 월세를 연체했고 집주인으로부터 퇴거 통보를 받았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쫓겨난 그는 자동차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
#2. 북동부 매사추세츠주에 사는 중년 남성은 은행 융자로 집을 구입했고, 여유 공간에 세를 놨다. 그런데 그 후 직장을 잃은 데다 세입자에게 받는 월세도 계속 줄어 이중고에 처했다. 자신이 소유한 주택은 은행에서 차압당했고 요즘에는 자신이 살던 집에서도 쫓겨날 위기다.
매슈 데즈먼드 미 프린스턴대 사회학과 교수가 운영하는 ‘저스트셸터’란 웹사이트에는 최근 수년 동안 월세를 못 내서 보금자리에서 쫓겨나야 했던 미국인의 사례가 올라와 있다. 대부분은 세입자들의 딱한 사연으로 구성됐지만 월세를 제때 못 받아 어려움에 처한 집주인의 이야기도 적지 않다. 상당수 집주인은 100% 자기자본이 아닌 은행 대출을 통해 집을 구입한 사람들이어서 임대료를 제때 받지 못하면 이들 또한 집을 잃을 위기에 몰린다. 집주인에게 돈을 빌려준 금융사 역시 담보가치 하락, 대출 회수 감소 등으로 어려움에 처한다.
이에 이번 사태가 ‘세입자 월세 미납→집주인 수입 감소→금융사 대출 부실’ 순으로 연쇄 확산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세계 금융위기의 도화선이 됐던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와 비슷한 상황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비영리 연구기관 애스펀연구소, 컨설팅사 스타우트, 각 대학 전문가들이 최근 공동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미국에서는 최대 4000만 명이 강제 퇴거 위기에 처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서브프라임 사태 후폭풍이 휘몰아쳤던 2008∼2010년 주택을 압류당한 미국인은 380만 명이었다. 당시보다 훨씬 큰 위기가 닥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셈이다.
9월 미 인구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이미 미 전체 세입자의 6분의 1인 1100만 가구가 월세를 체납하고 있다. 연체액도 상당하다. 필라델피아 연방준비은행에 따르면 올해 말까지 세입자들이 내지 못한 집세가 72억 달러(약 8조 원)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훨씬 비관적인 전망을 내놨다. 정부가 조속히 부양책을 내놓지 못하면 연말까지 밀린 월세가 총 700억 달러(약 77조 원)까지 불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 소수인종에게 더 가혹한 주거 위기
월세 체납은 비(非)백인, 저소득층 등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흑인, 아시안, 히스패닉 가구의 월세 체납 비율은 모두 20% 안팎으로 높게 형성되고 있지만 백인 가구는 약 9%에 불과하다.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역시 흑인과 라틴계 캘리포니아 주민이 코로나19로 인해 임차료 체납 위험에 직면할 가능성이 백인보다 2배 높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올해 8월 인구통계국 조사에서 히스패닉의 49%와 흑인의 42%는 각각 ‘이달 월세를 낼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고 답했다. 백인은 22%에 불과했다. “지난달 월세를 제때 내지 못했다”고 답한 비율 역시 흑인과 히스패닉은 각각 26%, 25%였지만 백인은 13%에 그쳤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경기 침체 및 실직 충격이 비백인 가구에 집중됐다는 뜻이다.
하버드대 주거연구 공동센터는 최근 ‘2020년 미국의 주거 임차 보고서’에서 “강제 퇴거 위기는 저소득 가구일수록 심각하고, 같은 소득 구간이라도 히스패닉과 흑인 등이 백인보다 더 큰 위기감을 느낀다”고 진단했다. 특히 강제 퇴거는 결국 이들을 노숙인으로 전락시킬 가능성이 높아 사회 전체의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 실효성 낮은 퇴거유예 조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올 9월 당분간 집세를 내지 못하더라도 강제 퇴거 조치를 할 수 없도록 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세입자들이 대거 집밖으로 쫓겨나면 코로나19 확산을 부채질할 수 있다는 우려로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발동했다. 내년 1월까지 한시적으로 시행된다.
다만 조치의 실효성은 크지 않은 편이다. 세입자가 이 혜택을 누리려면 코로나19로 소득 피해를 입었다는 진술을 포함한 문서에 서명을 한 후 집주인에게 제출해야 한다. 하지만 이 서류를 제출해도 집주인은 거부할 권리가 있다. 프린스턴대 자료에 의하면 행정명령이 발동된 올해 9월 초∼10월 중순까지 미 22개 도시에서 2만 건이 넘는 집주인의 퇴거 소송이 법원에 접수됐다.
올 9월 집주인 측의 ‘퇴거 통지문’을 받은 플로리다 주민 크리스티나 벨레스 씨는 NBC방송에 “집을 소유한 관리회사 측에서 CDC의 세입자 퇴거유예 조치에 대한 설명을 전혀 해주지 않았다”고 울분을 토했다. 그는 “코로나19로 직장을 잃어서 월세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했지만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임차료 연체와 상관없는 사소한 계약 위반을 근거로 CDC 명령을 회피하면서 세입자를 내쫓으려는 집주인도 있다. 이미 일부 집주인은 CDC의 상위기관인 보건복지부를 상대로 “CDC 행정명령이 법적 근거가 없다”는 소송까지 제기했다.
○ 사회 전체 연쇄 파장 우려
퇴거유예가 세입자에게 잠시 시간을 벌어줬을 뿐 월세 자체를 감면해 준 것은 아니어서 언제든 시한폭탄이 터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월 임차료도 내지 못하는 세입자가 몇 달씩 밀린 임차료를 한꺼번에 납부할 가능성은 아주 낮은 만큼 내년 1월 한시적 퇴거유예 조치가 종료되면 그야말로 대란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의미다.
또한 세입자들이 월세 납부를 위해 다른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이면 미 경제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개인 소비 또한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월세를 제때 받지 못하는 집주인 역시 예전 수준의 소비를 할 가능성이 적다.
일각에서는 사태가 뻔히 예견됐음에도 정쟁, 대선 등을 이유로 사태를 수수방관한 정치권을 비판한다. 트럼프 행정부가 내놓은 경기부양책에는 세입자 집세에 관한 직접적 항목이 없었고 야당 민주당 또한 소극적으로 대처하긴 마찬가지였다는 의미다. 뉴욕,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등 미 대도시의 임대료는 이미 세계에서 가장 비싼 축에 속한다. NBC뉴스 보도에 따르면 2016년 뉴욕시 일반 가구는 소득의 3분의 2를 주거비에 썼다. 매년 뉴욕시에서만 약 10만 가구가 퇴거를 당했다는 결과도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번 사태의 근본적 해결책이 코로나19 종식 및 경제 활성화라는 데 있다. 최근 미국의 일일 신규 확진자 수가 10만 명을 훌쩍 넘을 정도로 재확산이 심각한 상황이어서 코로나19 종식 시점을 점치는 것도, 언제쯤 미 경제가 정상화할지 예측하는 것도 쉽지 않다. 카르멘 라인하트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블룸버그TV 인터뷰에서 “팬데믹이 경제 위기로 바뀌고 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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