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마다 그 계절이 내는 소리가 있다. 가을엔 가을의 소리가 있다. 갈대밭과 억새밭, 흩날리는 낙엽들이 내는 소리도 그렇지만 특히 여치나 메뚜기, 귀뚜라미 같은 풀벌레들이 내는 소리는 묘한 선율을 타고 가슴속을 파고든다. 이들의 소리는 갈수록 구슬퍼지는데 늦가을엔 애처로운 느낌까지 들 정도다. 어떻게 이런 소리를 낼까? 흔히 하는 말처럼 가을이 가는 걸 슬퍼하는 걸까?
우리에게는 분명 그렇게 들리지만 슬퍼서 그런 건 아니다. 아니 사실 슬플 수가 없다. 수컷들이 암컷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려 짝짓기를 하려는 유혹의 소리가 어찌 슬프겠는가. 성대가 없는데 어떻게 소리를 낼까 싶지만 꼭 입으로만 소리를 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입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멋진 소리를 낼 수 있다. 메뚜기는 뒷다리로 앞날개를 비비고, 여치와 귀뚜라미는 앞날개끼리 마찰을 시켜 소리를 낸다. 귀뚜라미 날개를 자세히 보면 좌우 날개 아랫면에 좀 거친 부분이 있는데 이걸 바이올린을 켜듯 비벼 소리를 낸다. 그러니까 ‘성악’이 아니라 ‘연주’인 셈이다.
물론 소리만 내서는 어림도 없다. 평가자인 암컷들이 ‘멋지다’고 할 정도가 되어야 선택을 받을 수 있으니 최선을 다해 훌륭한 연주 실력을 뽐내야 한다. 하지만 세상 일이라는 게 참 알 수 없어서 최선을 다한다고 그만큼의 보답을 받는 게 아니다. 반대로 최선을 다할수록 위험해질 수도 있다. 어디서나 그렇듯 기회가 혼자 오지 않고 위험과 같이 오는 까닭이다. 멋진 연주가 포식자의 귀에도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유전자를 남길 수가 없다. 그러니 이들에게 최선이란 어찌 될지 모르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목숨을 거는 모험이다.
그러면 가을이 끝나갈수록 애처롭게 ‘우는’ 건 뭘까? 짝을 찾지 못해서 그럴까? 사실 더해가는 애처로움은 의도적인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곤충은 변온동물이라 기온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날씨가 따뜻하면 체온을 쉽게 올릴 수 있어 크고 멋진 소리를 낼 수 있지만, 반대로 기온이 내려가면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어 소리 내기가 힘들어진다. 아직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녀석들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내보지만 굳은 몸에서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오겠는가? 이 힘겨운 소리가 우리 귀에는 애처롭게 들리는 것이다.
갈수록 구슬퍼지는 소리는 이런 이유로 북쪽에서 시작되어 점점 남쪽으로 내려가고 같은 지역이라도 그늘진 곳보다 햇빛이 있는 곳에서 나는 소리가 더 좋다. 그래서 북미 인디언들이 이들의 소리를 ‘가난한 사람들의 온도계’라고 했다던가.
요즘처럼 날씨가 추워지면 애처롭기까지 하던 소리마저 사라진다. 1년이 다 가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에겐 1년이지만 풀벌레들에겐 일생이다. 그러고 보니 진짜 슬퍼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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