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관계자’는 누구일까[광화문에서/김현수]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1월 24일 03시 00분


김현수 산업1부 차장
김현수 산업1부 차장
“업종도 안 쓰면 안 될까요?”

취재원의 이름이나 소속 회사를 가리고 ‘∼관계자’로 기사에 써 달라는 말은 자주 듣지만 전자, 철강, 자동차와 같은 업종명까지 숨겨 달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 기업 ‘관계자’인 그는 정부 정책을 비판하던 중이었다. 기사는 구체적이어야 신뢰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익명 요청을 받을 때마다 곤혹스럽다.

하지만 곧 수긍이 갔다. 업종이 노출되면 해당 업계의 대표 기업이 어딘지 짐작할 수 있고, 당국에 찍혀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기업인들의 익명 요청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한번은 대기업의 부회장급 인사가 사적인 자리에서 “기업인의 경영 활동이 죄로 치부되는 사회”라며 반(反)기업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을 들었다. 의미가 있는 것 같아 직접 글로 쓰거나 인터뷰를 하는 것은 어떠냐고 넌지시 말해봤다. 그는 손사래를 쳤다.

“공개적으로 누가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아는 분도 괜히 얘기했다 세무조사를 받았다고 하던데요.”

‘찍힌다’는 공포는 실체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사례가 수차례 반복되다 보면 공포는 학습되기 마련이다. 실제로 정치인, 법조인, 시민단체 인사들은 온갖 정제되지 않은 말로 개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도배하곤 하지만 기업인들은 유독 조용하다. 스타트업 창업자가 종종 SNS로 논쟁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요즘은 뜸해졌다.

과거에는 적극적으로 사회에 대한 생각을 밝히는 기업인들이 많았다. 1960년대에 농업 개발이 먼저인지, 공업 투자가 먼저인지 논란이 일었다.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언론사 기고를 통해 “기간산업의 건설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며 공업에 투자해야 한다에 힘을 실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맡았던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고 최종현 SK그룹 회장, 고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도 정부나 정치권에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과거라고 정부의 힘이 세지 않았던 건 아니다. 다만 과거엔 기업과 정부가 일종의 파트너십이 있었다. 이제는 파트너십이라기보단 규제 또는 견제의 대상인 일방적 관계에 가깝다. 경제단체마저 익명을 요구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일까.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현 정부는 정책 키워드인 ‘공정경제’와 ‘혁신성장’ 중 공정에 기울어져 있다” 정도의 표현도 익명으로 해달라고 했다. 다른 곳은 조사한 자료의 출처를 밝히지 말아 달라고도 했다.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논쟁을 통해 사회적 지식수준을 끌어올려야 할 교수들도 익명을 요구할 때가 많다. 한 교수는 “자칫 ‘친기업 인사’라면서 제자나 누리꾼들로부터 비판을 받는다. 말을 안 하고 싶다”고 했다.

특정 의견을 가진 측이 불이익이 두려워 쉬쉬하는 사이에 반대 측 목소리만 크게 들린다. 이는 누구든 자유롭게 생각을 말하고, 그 속에서 합리적 대안을 찾는 민주주의 원칙에도 벗어난다. ‘재계 관계자’를 넘어 거리낌 없이 이름을, 사명을, 업종을 밝혀도 되는 날은 언제 올까. 전 국민의 ‘홍길동화’도 아니고, 이름을 드러내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몰랐다.
 
김현수 산업1부 차장 kimhs@donga.com
#재계 관계자#불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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