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을 ‘파블로프의 개’로 만든 신공항 논란[여의도 25시/최우열]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1월 24일 03시 00분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의 ‘가덕도 신공항 입지 선정’ 발언 논란으로 야권의 신공항 갈등의 원조가 된 2012년 11월 30일 부산 괘법동 유세 현장. 동아일보DB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의 ‘가덕도 신공항 입지 선정’ 발언 논란으로 야권의 신공항 갈등의 원조가 된 2012년 11월 30일 부산 괘법동 유세 현장. 동아일보DB
최우열 정치부 기자
최우열 정치부 기자
“앞으로 공정하고 투명한 절차를 거쳐서 최고 전문가들이 객관적인 평가를 한 뒤 부산 가덕도가 최고 입지라면 당연히 가덕도로 (신공항 입지를 선정)할 겁니다.”

2012년 11월 30일 부산 사상구 괘법동 서부터미널 앞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가 ‘가덕도’를 외치자 부산 시민들의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부산 유세 중 가장 큰 호응이었다. 부산 지역구 의원이었던 김무성 선대위 총괄본부장이 “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신공항은 부산 의원들과 김무성이 반드시 가덕도에 유치하겠다”고 하자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하지만 서울 여의도 당사에선 예상치 못한 난리가 났다. 경남 밀양 신공항을 주장하던 대구경북 의원들은 “후보가 협의도 없이 가덕도 유치를 공약해 버린 게 아니냐”며 문제를 제기했고, 서병수 사무총장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입지는 객관적인 전문기관에 맡기겠다는 게 박 후보의 입장”이라고 해명에 나섰다. 하지만 “여러 입지 여건을 봐서 부산 쪽에 (신공항이) 위치하지 않을까 기대한다”는 부산 출신 서 총장 발언은 오히려 갈등에 기름을 끼얹어 버렸다.

그로부터 꼭 8년 뒤, 문재인 정부의 김해신공항 백지화 결정에 국민의힘(새누리당 후신) 대구경북과 부산 세력이 똑같은 문제로 다시 충돌하며 야당이 갈피를 못 잡고 있다. 2012년을 기억하는 국민의힘 관계자들은 “야당이 마치 조건반사를 하는 ‘파블로프의 개’가 된 듯하다”며 자괴감을 드러냈다. 이미 8년 전의 기억을 갖고 있으면서도 현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의 ‘가덕도 폭탄’을 맞고 8년 전과 똑같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에 제1야당의 실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얘기다.

사실 문재인 정부의 ‘김해신공항 뒤집기’는 2017년 정권이 출범할 때부터 민주당 부산 의원들이 공·사석에서 언급하며 ‘예열’을 시작했고, 지난해 12월 김해신공항 검증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본격화됐다. 국민의힘 지도부가 지금 와서 깜짝 놀란 듯 “부산시장 보궐선거용 전략”이라고 정부 여당을 비판하지만, 정치권 상황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이 카드는 언제든 나올 패로 인식하고 있었다. ‘오거돈 전 부산시장 파문’으로 그 시기만 미세조정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특히 국민의힘은 올 7월 이미 여권이 장전하고 있던 각종 균형발전 이슈에 대해 선제적으로 대응할 기회가 있었다. 민주당 김태년 원내대표가 갑자기 ‘행정수도 이전’을 꺼냈을 때였다. 당시 국민의힘 충청권 의원들이 잠시 동조하기도 했지만, 당 지도부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문과 부동산 실정 덮기용 전략에 휘말리면 안 된다”며 분위기를 다잡으면서 일단 진화됐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때 국민의힘 전·현직 의원들과 당직자들 사이에서 “민주당의 수도 이전 및 공공기관 이전 전략에 맞설 새로운 버전의 국토균형발전 방안을 내놔야 한다” “기업 유치를 기반으로 하는 세종시 수정안도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그때 당 차원에서 균형발전 대안 마련에 집중했다면 신공항 문제에 대해서도 다양한 액션 플랜이 나왔을 상황이었다.

실력 있는 야당이 되려면 과거로부터 배우고 미래를 예측해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옛 사례에서부터 지금 정부 여당이 뭘 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시시각각 수집하고 축적·분석해야 하는데 지금 국민의힘은 그 기능의 상당 부분이 마비됐다. 이렇게 수년을 보내다 보니 여권 인사들의 문제 발언에 대해 기자들이 묻지 않으면 모른 채 넋 놓고 있는 야당, 그나마 이튿날에야 조간신문 보고 리뷰식 논평을 내놓는 야당, 하루하루 별 화제도 모으지 못하는 네거티브 이슈에 의원 이름 내기에 급급한 야당이 되어가고 있다.

실력 있는 야당이 있어야 정부 여당의 실력이 길러지고, 국민이 편안해진다. 의석수만 믿는 여당 폭주와 아마추어식 부동산 정책, 선거 전략용 국책사업 뒤집기에 ‘전혀 두렵지 않은 야당’도 그 책임이 일부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최우열 정치부 기자 dnsp@donga.com


#가덕도 신공항#박근혜#김해신공항 백지화 결정#문재인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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