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태아도 불행한 낙태… ‘낙태 줄이는 낙태법’ 돼야[논설위원 현장 칼럼]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1월 25일 03시 00분


국회로 간 낙태법 개정안
식지 않은 낙태찬반 공방

지난해 4월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라 정부가 낙태 관련 규제를 대폭 완화한 개정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여성계는 낙태죄 전면 폐지를 주장하고 있고(왼쪽 사진) 종교계와 산부인과 및 소아청소년과 의사 단체는 낙태 허용 기준 강화를 요구하며 대립하고 있어 국회 입법 과정에서 진통이 예상된다. 동아일보DB
지난해 4월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라 정부가 낙태 관련 규제를 대폭 완화한 개정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여성계는 낙태죄 전면 폐지를 주장하고 있고(왼쪽 사진) 종교계와 산부인과 및 소아청소년과 의사 단체는 낙태 허용 기준 강화를 요구하며 대립하고 있어 국회 입법 과정에서 진통이 예상된다. 동아일보DB
이진영 논설위원
이진영 논설위원
뜻밖의 임신을 하게 된 여고생 A는 임신 23주 차에 인터넷을 검색해 찾아간 병원에서 불법 낙태 시술을 받다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 8년 전 일이다. 내년부터 A 같은 여성은 임신·출산종합상담기관에서 상담사실 확인서를 받으면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낙태 시술을 받을 수 있다.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을 반영해 정부가 24일 국무회의에서 의결한 형법 개정안에 따르면 임신 14주까지는 무조건, 15∼24주는 성범죄로 인한 임신이나 의학적 사유 외에 사회·경제적 이유로도 낙태할 수 있게 된다. 국회에는 대한산부인과학회 등의 제언에 따라 낙태 허용 조건을 강화한 법안과 여성계의 요구를 반영해 낙태죄를 전면 폐지하는 법안도 발의돼 있다. 낙태법 개정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 직업군인 산부인과 의사 둘을 만났다. 낙태죄 폐지에 대한 의견은 달랐지만 입법 취지를 살리기 위한 후속 대책에 대해서는 같은 내용을 주문했다.

“낙태 금지해도 낙태율 줄지 않아”


오정원 산부인과 전문의(34)는 낙태죄 전면 폐지를 주장하는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회원이다.

“낙태를 금지해도 낙태율은 줄지 않고 여성 건강만 위험해진다. 2009년 ‘프로 라이프 의사회’가 결성돼 낙태 시술 의사들을 고발한 적이 있다. 하지만 시술비만 수백만 원대로 치솟고 다른 나라로 원정을 가는 여성도 급증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2018년)에 따르면 낙태의 95%가 12주 이하에 이뤄지고, 낙태 사유의 66%가 사회·경제적 이유다. 24주까지 사회·경제적 이유의 낙태가 허용되면 전면 허용이나 마찬가지인데 꼭 낙태죄를 폐지해야 하나.

“생리가 불규칙한 사람들은 16주가 되도록 모르는 경우도 있다. 24주가 넘어가도 낙태해야 할 사정이 있을 수 있다. 돈과 인맥이 있으면 어떻게든 안전하게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여성들은 불법 시술이나 인터넷에서 구매하는 불법 낙태약 말고는 방법이 없다.”

―임신 8주 이후로는 낙태로 인한 임신부 사망 위험도가 2주마다 두 배로 증가한다.

“맞다. 하지만 분만의 위험률과 모성 사망률보다는 높지 않다. 반면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안전하게 낙태할 때와 그렇지 않은 경우 사망률은 10∼30배 차이가 난다. 낙태를 합법화해 안전한 시술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태아 건강, 모체에서 뗄 수 없어”



―대한신생아학회는 조건부 낙태 가능 주수를 22주 미만으로 강화하자는 의견을 냈다. 헌재도 태아가 모체 밖에서 생존 가능한 시기를 22주라고 했고, 삼성서울병원에선 2013년 21주 5일 만에 490g으로 태어난 초미숙아를 살려냈다. 22주가 넘는 낙태는 살인 아닌가.

“생명은 연속적인 것이다. 임신 몇 주까지는 생명이 아니고 이후는 생명이다, 이렇게 나눌 수 없다. 태아와 모체는 유기적인 관계로 태아의 건강은 모체의 건강에서 떼어놓고 보장할 수 없다.”

―24주 이내 낙태 허용으로 미숙아 소생술이 퇴보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살린다고 끝이 아니다. 아무런 장애 없이 살아갈 확률은 더욱 떨어진다. 오랜 기간 막대한 비용을 들여 양육해야 하는데 이건 여성 개인의 책임이다. 국가가 출산 또는 낙태를 결정할 게 아니라 여성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권리로서 보장해야 한다.”

―14주면 태아 성별 확인이 가능하고 유전자 검사로 이상 여부도 알 수 있다. 낙태가 자유로워지면 성별 또는 정상적인 아이 골라 낳기라는 윤리적 문제가 생긴다.

“아들을, 비장애아를 낳아야 한다고 요구하는 사회는 그냥 두고 여성만 비난하는 것은 문제다. 지금도 우생학적 사유의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모자보건법 시행령 제15조). 이건 윤리적인가.”

―낙태죄 폐지는 여성의 선택권을 위해 태아의 생명권을 침해하는 것 아닌가.

“태아의 생명은 소중히 여기면서 왜 살아 있는 여성이 건강하게 살아갈 권리는 존중하지 않나. 낙태죄 보호법익이 태아의 생명권인지도 의심스럽다. 여성을 낙태죄로 고소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헤어진 남자 친구나 이혼 통보를 받은 남편이다. ‘왜 내 아이를 마음대로 지웠느냐’며 협박 수단으로 낙태죄를 악용한다.”

―산부인과 의사에게 낙태란 무엇인가.

“WHO에서 천명한 것과 같이 필수보건 의료 서비스다. 낙태가 불법이어서 산부인과 수련 과정 중 낙태 전과 후에 적용해야 할 가이드라인에 대해 꼼꼼히 배우지 못했다. 필요한 여성들에게는 24주 이후라도 안전한 낙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낙태죄 존폐를 다투는 동안 지금도 누군가는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혼자 고민한다. 최선의 방법을 찾아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모체 밖 생존 가능 태아 낙태는 살인”


김찬주 가톨릭대 의정부성모병원 산부인과 교수(54)는 낙태죄 폐지에 반대한다. 낙태법은 “최대한 생명을 살리는 방향으로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여성계에선 낙태죄 폐지를 주장한다.

“한때 밤을 새워가며 분만을 했다. 지금은 부인종양이 전공인데 어떻게 하면 한 명이라도 자궁암을 예방해 불임을 막을 수 있을지 뛰어다니는 의사로서 허탈할 뿐이다. 낙태를 전면 허용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낙태 실태는 어떠한가. 불법이다 보니 신뢰할 만한 통계가 없다.

“가톨릭대에 있으니 낙태 안 해도 된다고 주위에서 부러워한다. 개업하면 먹고살기 위해 한다. 분만은 줄고 초음파 검사도 보험이 적용돼 돈이 되지 않는다. 생명을 살리는 직업인데 낙태 시술을 하다 보면 정신적으로 힘들다.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면 안 한다.”

―대한산부인과학회에선 조건 없는 낙태 허용 시기를 임신 10주 미만으로 제한하자고 한다.

“10주가 지나면 임부도 위험해지고 태아도 장기와 뼈가 형성된 상태다. 태아 심장은 임신 6, 7주부터 뛰기 시작한다. 미국 일부 주에선 태아 심장이 뛰면 낙태를 금지하는 ‘태아 심장 박동법’을 통과시켰다(※조지아 아이오와 등 10여 개 주가 입법했지만 연방대법원에서 위헌 결정이 나오고 있다).”

―산부인과학회도 신생아학회도 조건부 낙태 가능 주수를 22주 미만으로 강화하자고 했는데 정부안은 24주다.

“엄마 몸 밖에 나와도 살 수 있는 아이를 낙태한다는 건 살인이다. 22주면 낙태 시술을 어떻게 하는지 아나. 태아의 팔 다리 머리를 모두 조각내 자궁 밖으로 꺼낸다. 다 꺼냈는지 확인하기 위해 꺼낸 조각들은 다시 퍼즐 맞추듯 맞춰 본다. 의사도 못 할 짓이고, 임부도 위험한 일이다.”

“낙태죄 폐지는 여성 死地로 모는 것”


―낙태를 범죄화하면 낙태 음성화로 가난한 여성들이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낙태를 허용하면 여성이 자유롭고 행복해질까. 아이 아버지에게 양육비를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는데 낙태까지 허용하면 남자들이 ‘누가 낳으랬어?’ 하지 않겠나. 여자들이 더 사지(死地)로 내몰릴 수 있다. 한국에선 가난한 여성이 기대치 않은 임신을 하면 아이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돈으로는 분윳값도 감당 못 한다. 임신 출산 양육에 대한 책임을 남녀 모두가 지도록 해야 한다.”

―10대의 출산 건수도 매년 1000건이 넘는다.

“중고교에 성교육 하러 가면 학생들은 ‘불임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몸 관리를 하면 되느냐’ ‘난자 보관법은 무엇이냐’를 묻는다. 그런 학생들에게 피상적인 피임 교육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피임 교육이 아니라 생명 교육을 해야 한다. 중고교 10대 미혼모들 중 낙태하려고 병원에 왔다가 못 하겠다며 출산하는 아이들이 있다. 이들을 돕는 기관이 있는데 검정고시 공부 시키고 아기들도 돌봐준다. 열심히 공부해 간호대에 진학한 친구들도 있다. 배 안의 생명을 지켜낸 용기 있는 아이들을 돕고 격려해야 한다.”

―사회·경제적 사유로 낙태하려면 임신·출산종합상담기관에서 상담사실 확인서를 발급받은 뒤 24시간의 숙려 기간을 거쳐야 한다.

“확인서나 형식적으로 떼 주는 기관이 될까 걱정이다. 임신과 출산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수정도 어렵고 수정 후 65∼75%만이 만삭에 분만을 한다. 상담과 숙려 기간은 그 어려운 과정을 거치고 심장이 뛰는 단계에까지 이른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자격 있는 사람들에 의한 내실 있는 상담이 이뤄져야 한다.”

캐나다는 선진국들 중 거의 유일하게 낙태가 전면 허용된 나라다. 그런데 10대 미혼모들을 위해 교내에 탁아소를 운영하는 고교들이 있다. 재학 중 임신을 해도 학교가 젖먹이를 봐주는 동안 공부하고 졸업한다. 낙태하기 쉬울수록 낙태를 덜 한다는 역설이 있다. 전 세계 낙태율(15∼44세 가임기 여성 1000명당 낙태 건수)은 35인데 일정 주수에 한해 낙태를 허용하는 북미(17)와 북서부 유럽(18)보다 낙태를 금지하는 아프리카(34)와 남미(44)가 높다. 피임으로 임신을 하는 경우가 적고, 임신했을 땐 안심하고 출산할 수 있도록 사회가 돕기 때문이다. 한국 기혼과 미혼 여성의 낙태율은 6 대 4라고 한다. 기혼 여성은 둘째 셋째를 기를 형편이 못 돼서, 미혼 여성은 퇴학당하고 회사에서 쫓겨날까 봐 수술대에 오른다. 이 모든 고민과 책임이 여성들만의 몫이다. 이런 현실을 그대로 둔 채 낙태 규제만 완화해서는 낙태율 감소를 기대할 수 없다. 낙태법 개정은 낙태 문제 해결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어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낙태#폐지#국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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