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편일 때는 더없이 좋지만 상대편이면 지극히 피곤한 사람이 있다. 프로야구 LG 트윈스의 새 사령탑 류지현 감독(49)의 선수 시절이 그랬다.
타석에 들어서면 그는 스파이크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많은 타자들이 자세를 고정하기 위해 땅을 고르곤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류지현(176cm)은 키를 더 작게 만들어 스트라이크존을 줄이려고 그러는 것”이라고 했다.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쉽게 볼넷을 얻어 1루로 나갔다. 누상에 나갔다 하면 빠른 발과 주루 센스로 상대 배터리를 쉴 새 없이 괴롭혔다.
덩치가 크지 않은데 홈런도 곧잘 쳤다. 신인이던 1994년 가장 넓은 서울 잠실구장을 안방으로 쓰면서도 홈런 15개를 때렸다. 대부분의 홈런은 홈플레이트에서 가장 가까운 왼쪽 펜스를 살짝 넘어갔다. 그 일대는 ‘류지현존’으로 불렸다. 1990년대 LG의 신바람 야구를 이끌었던 그는 ‘꾀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KBO리그 연봉조정신청에서 승리한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조정위원들이 선수나 구단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이 제도는 구단에 유리하다. 구단은 방대한 자료와 인원이 있지만 에이전트가 없던 시절 선수는 혈혈단신으로 싸워야 했다. 2002년 그는 선수로는 처음 이겼고, 이후 누구도 연봉조정신청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류 감독은 2004시즌을 마지막으로 선수에서 은퇴해 지도자로 변신했다.
화려한 선수 시절을 보냈던 그가 40년 가까운 야구 인생을 살면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은 2007년부터 2년간 미국으로 코치 연수를 떠났던 것이다.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이었다. 자기 돈으로 연수를 갔고, 현지에서 모든 걸 스스로 헤쳐 나갔다. 시애틀 산하 마이너리그 구단을 돌며 몸으로 배우고 익혔다. 그는 이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은퇴 후 코치가 됐지만 선수들에게 뭘 어떻게 줘야 할지를 몰랐다. 하지만 2년간의 미국 연수를 통해 선수들에게는 기술보다 방향성을 제시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선수가 믿고 따르는 코치가 되려면 내가 더 많이 공부하고, 연구해야 했다.”
데이터의 중요성도 그때 깨달았다. 그는 “한국도 많이 달라졌지만 미국에서는 이미 그때부터 경기나 훈련 후 모든 선수의 기록을 데이터화했다. 클릭 한 번으로 선수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알 수 있었다”고 했다. 다시 LG로 돌아온 뒤 그는 수석 코치와 수비, 주루 코치 등을 지내며 선수들을 키웠다. 데뷔 초기 ‘돌 글러브’에 가깝던 오지환을 리그의 수준급 유격수로 키워낸 게 대표적이다.
올 시즌을 마지막으로 류중일 감독이 물러난 뒤 LG는 새 감독을 선임하며 여러 기준을 제시했다. 데이터와 소통, 그리고 팀 운영 철학이었다. 모든 면에서 류지현은 ‘준비된 감독’이었다. 최종 면접에서 5 대 1의 경쟁을 뚫고 LG 사령탑으로 낙점된 그는 “누구든 모를 수 있다. 하지만 모르는 걸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답을 구해 와야 한다. 선수들은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지도자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시대가 변했고, 야구도 달라졌다. 야구도 이제는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시대가 됐다. 이제는 그간의 배움을 성적으로 증명하는 일만 남았다. LG가 마지막으로 우승한 해는 그가 신인이던 1994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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