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북한 고지가 훤히 내다보이는 25일 동부전선. 세찬 바람이 분 이날 군은 출입기자를 대상으로 동부전선 현장견학을 진행했다. 3일 20대 북한 남성 A 씨가 최전방 경계부대(GOP) 철책을 넘어온 사건으로 문제가 된 과학화 경계시스템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3m가 넘는 철책 최상단까지 그물망처럼 부착된 감지센서를 보고 기자들 사이에선 “이걸 어떻게 뛰어넘느냐”는 말들이 나왔다.
일단 군에서 판단한 A 씨의 월책 경위는 이렇다. 먼저 철책 기둥을 타고 올라간 A 씨는 철책 상단의 ‘Y피켓’(Y자 모양의 긴 쇠막대)에 안착했다. 통상 Y피켓엔 일정 무게 이상의 하중이 가해지면 경보가 울리는 ‘상단감지 브래킷’이 달려있지만 그가 넘은 철책엔 이 장비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 더욱이 Y피켓 가장 끝부분에 달려 있던 또 다른 상단감지센서는 나사가 풀려 있어 A 씨가 철책을 넘는 와중에도 경보를 울리지 않았다.
몸무게 50kg에 북한에서 기계체조 선수였던 A 씨의 민첩함으로만 이 사건을 설명하기엔 과학화 경계시스템의 구멍은 생각보다 컸다. 무엇보다 상단감지센서에 대한 점검은 5년간 한 차례도 이뤄지지 않았다. 분단의 최전선에 2000억 원짜리 장비를 설치하고도 군은 체계적인 관리 매뉴얼조차 제대로 수립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이날 군 관계자들의 설명은 산세가 험한 동부전선 경계의 어려움에 집중됐다. 평지가 많은 서부전선과 달리 감시 사각지대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또 2012년 북한 병사가 생활관 창문을 두드려 귀순한 ‘노크 귀순’ 때보다 우리 군 경계력은 훨씬 강화됐다고 자평했다. 그러면서 ‘경계 작전은 정상적으로 이뤄졌다’며 관련 부대 지휘관들에 대한 합동참모본부 차원의 징계 의뢰 등 조치는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도 했다. 이렇다 보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재확산에도 군이 현장견학을 강행한 것이 완벽한 경계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냐는 말까지 나왔다.
군은 그간 ‘물샐틈없는’ 과학화 경계시스템을 맹신해왔다. 하지만 이번 사건으로 지난해 아프리카돼지열병(ASF) 창궐 당시 “멧돼지도 뚫고 올 수 없다”던 정경두 전 국방부 장관의 말도 무색해졌다. 전방지역 장병들의 노고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최전방에서 과학화 경계시스템이 관리 소홀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상황에서 변명만 늘어놓는 군의 태도에 쓴소리가 나오는 게 사실이다.
군은 뒤늦게 장비 전수조사에 나섰지만 이미 군 내부에선 과학화 경계시스템 무용론이 만연하다. 제2, 제3의 월책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경계 효능에 대한 전면 재검토와 사후관리가 이뤄져야 한다. 사람이 닿아도 울리지 않는 2000억 원짜리 장비 때문에 조국 수호를 위해 불철주야 애쓰는 장병들의 노고를 헛수고로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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