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를 앞둔 아빠가 캠핑카를 사셨다.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타봤자 몇 번이나 타시겠냐, 그 돈으로 차라리 호텔 순회를 하시는 게 낫지 않겠냐 반대했지만 한번 정한 마음은 돌릴 수 없었다. 출고일이 다가오자 가족 카톡방에 공지 하나가 올라왔다. 이름하여 ‘캠핑카 이름 짓기 대회’. 하나씩 안을 내고 투표를 통해 최종 안을 선발했다. 상금 10만 원 수상의 영예는 ‘댄디’를 제안한 형부에게로 돌아갔다. 조카가 좋아하는 자동차 만화의 캐릭터 이름이었다.
처음 댄디를 만나러 간 날, 반짝거리던 아빠의 눈을 잊을 수가 없다. 아주 오랫동안 갖고 싶었던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 같았다. 이후 부모님은 매일이 여행이시다. 볼일이 있어 근교에 나가셨다가도 예쁜 바다가 보이면 어디라도 그곳이 목적지가 되었다. 아무런 채비 없이 나왔다가도 간단히 장을 봐 ‘급여행’을 즐기시는 모습이 30대 부부인 우리와 다를 바 없었다.
얼마 뒤 아빠는 ‘색소폰’을 장만하셨다. 아빠는 어릴 때부터 악기와 음악에 특출난 재능을 가지고 계셨다. 피아노도 치셨고, 기타는 기본이고 하모니카, 오카리나, 팬플루트까지 다양한 악기를 섭렵하고 계셨다. 세 딸로 대변되는 생활에 치여, 어느 정도 잊고 사시긴 했지만 아빠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음악이 있었다.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엄두를 못 내던 차에 엄마가 선물하신 것이다.
아빠는 시간을 내어 과외를 받고 연습실을 다니셨다. 워낙 기본기가 좋아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엄마는 매니저가 되어 연습하는 아빠의 영상을, 색소폰을 애지중지 닦는 아빠의 사진을 세 딸에게 틈틈이 공유해 주셨다. 열성 팬인 세 딸은 그때마다 열렬히 환호했다. 아빠는 아직 멀었다며 쑥스러워하시면서도 선생님께 받은 칭찬을 자랑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 카톡방에 영상이 하나 도착했다. 캠핑카에서 색소폰을 부는 아빠를 엄마의 시선으로 담은 영상이었다. 해질녘 바다의 분위기와 색소폰의 선율이 황홀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코끝이 시큰해져 왔다. 그리고 뒤이어 온 아빠의 메시지는 나를 그만 울려버렸다. ‘아빠가 꿈꾸던 삶이 이루어지는 첫 순간.’
세 딸과 씨름하느라 이제야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시는 두 분에 대한 죄송함과 감사. 막상 살아보니 타인과 부부로 산다는 게, 더군다나 예순이 되도록 알콩달콩 부부로 산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부부로서 착실히, 애틋하게 쌓아온 시간들에 대한 존경. 그리고 무엇보다 행복이라는 게 참 별게 아니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캠핑카, 색소폰으로도 완성될 수 있는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 아빠의 캠핑카와 색소폰은 소비가 아닌 상징이었다. 사치가 아닌 치하였다. 두 분의 지난 세월에 대한, 베풀어온 사랑에 대한.
내년 생신에는 작은 공간을 빌려 ‘디너쇼’를 열어 드리기로 했다. 집중받는 건 부담스럽다고 말씀하시면서도 연습을 열심히 해야겠다고 두 눈을 반짝이는 아빠를 보니 가슴이 뭉클하다. 오랜 세월 애써온 아빠에게 더 많은 캠핑카와 색소폰을, 더 많은 설렘을 선물해 드리고 싶다. ‘출근’이 사라진 당신 일상의 빈자리가 결코 공허하지 않게, 당신의 딸이어서 누려온 행복만큼 이제는 당신께 돌려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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