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과일을 가장 좋아하세요? 묻는다면 나는 사과라고 대답한다. 어떤 디저트를 좋아하세요? 묻는다면 나는 사과파이라고 대답한다. 사람들은 내가 사과술을 만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옛날부터 사과를 좋아했다. 왜 구약성서에서 사과를 금단의 열매로 취급하는지 모르겠다. 너무 맛있으니까 위험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사과의 달콤함에 빠져 하느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는 유혹의 과일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다.
그만큼 사과는 맛있다. 그러나 올해 사과는 작년보다 덜하다. 그래도 여전히 맛있다. 착즙할 사과를 양조장 안에 가득 들여놓았다. 이상하게도 사과를 착즙할 즈음이면 꼭 한파가 들이닥친다. 사과 때문에 불을 피울 수도 없다. 사과는 더운 공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쉿! 그렇게 문을 쾅쾅 닫지 마. 얘들이 놀란다고 말했잖아.” 사과는 시끄러운 소리도 좋아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과에 붙어 있는 야생효모들이다.
착즙을 앞두고 있으면 레돔은 좀 예민해진다. 착즙하기에 가장 좋은 날짜를 잡는다. 그리고 청결에 힘쓴다. 세척통과 분쇄기, 칼날, 착즙기, 발효통, 모든 것을 새로 깨끗이 씻는다. 소다와 황으로 소독한 뒤 다시 세척하고 말린다. 기계에 균이라도 붙어 효모에게 나쁜 영향을 줄까봐 걱정한다. 효모의 안녕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한다.
밭에서 실내로 들어온 첫날 사과들은 꼼짝도 않는다. 이틀쯤 지나면 천천히 향기를 흘리기 시작하고, 날이 갈수록 복합적이고 오묘한 향을 뿜어낸다. 장소가 바뀌어 긴장했던 효모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이 각양각색인 것처럼 효모들도 생긴 것이 다르고 성격도 다르다. 어떤 것들은 잠만 자고, 어떤 것들은 게으르게 기지개를 켜고, 어떤 것들은 쉬지 않고 통통 뛰어다닌다. 천장에도 붙고 문에도 붙는다. 양조장 문을 열고 들어서면 달큼한 땀 냄새와 같은 강렬한 사과향이 확 느껴진다. 이것은 콧속으로 솔솔 들어오는 향이라기보다 누군가 나의 온몸을 꼭 껴안아주는 것만 같다.
어둠 속 사과 향에 온몸을 맡기고 한참 서 있다가 사과 한 알을 꺼내 깨물어 본다. 올해의 모든 것을 견뎌낸, 한 알 한 알에 2020년이 압축된 열매다. 달콤하고 씁쓰름하면서 새콤한 물이 입안으로 가득 퍼져 나간다. “당신을 죽도록 사랑해요.” 누군가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사과를 다 먹고 나니 기분이 좋다. 한 알의 사과를 먹었을 뿐인데 배 속에 긍정적인 에너지가 가득해진다.
사과를 폭 조리면 꿀 향기가 난다. 오븐에 구우면 고소한 아몬드 향이 난다. 책상 위에 두고 시들어가는 것을 볼 때도 좋다. 시들어가는 사과에선 찐득한 물이 나오고, 아카시아 향이 난다. 그러나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사과술이 발효될 때의 향이다. 시큼하면서도 씁쓰레하고, 시원하게 달콤한 향이 양조장에 출렁일 때는 무념무상 즐겁다. 효모들이 와글와글 노래하는 것만 같다. 사람들은 내가 술을 만들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다고 할 것이다.
“그렇게 못 믿겠으면 정말 슬플 때 한번 와봐.”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슬픈 사람이라도 발효탱크에서 사과술이 발효되는 향을 맡으면 위로받는 기분이 들 것이다. 이것은 마법이 아니다. 발효통에서 튀어나온 각양각색의 효모들이 다정하게 당신의 온몸에 붙어 뽀뽀를 백 번 천 번을 해주기 때문이다. 거짓말, 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정말 사과를 많이 먹어야 한다. 몸속에 있는 부정적 에너지를 다 몰아내야 한다.
사과는 과일 중에 가장 오래 매달려 있는, 태양에너지를 가장 많이 빨아들이는 과일이다. 그래서 사과는 늘 명랑하고 반짝거린다. 우울한 것을 참지 못한다. 그런 것은 온몸으로 다 녹여 버린다. 올겨울이 슬프다면 우선 사과를 잔뜩 책상 위에 올려놓으시길. 당신이 잠든 사이 효모들이 날아가 온몸에 백 번 천 번 뽀뽀를 해줄 것이다. 다음 날이면 “어, 오늘 기분이 괜찮네” 하고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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