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가을밤, 시인은 멀리 떨어져 있는 아내를 향해 연가(戀歌) 한 가락을 뽑는다. 오늘 비 내리는 이 파산(巴山)의 밤을 내가 어떻게 외로움을 달래며 보내고 있는지, 가을비에 넘쳐흐르는 못물처럼 그대를 향한 그리움이 얼마나 애틋한지, 우리 나란히 창가에 앉아 촛불을 밝히는 날 도란도란 회포를 나눌 수 있으리.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고운 님 오신 날 밤 굽이굽이 펴’(황진이)듯이 상봉의 그날을 위해 이 밤의 연모와 설렘을 꼬깃꼬깃 마음속에 갈무리해두리. 말투가 다정다감해서인지 시는 비 오는 타향의 가을밤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전혀 을씨년스런 분위기가 아니다. 재회의 기약은 없을지라도 초조해하거나 의기소침해하지 않고 오히려 달뜬 기대감에 부풀어 있어 훈훈한 안도감마저 느끼게 해준다.
한시에서는 같은 글자의 중복을 최대한 피하기 마련인데 이 시는 아예 ‘파산야우’(巴山夜雨)라는 한 구절을 통째로 반복한다. 왜 이런 파격을 마다하지 않았을까. 시인이 파산의 밤비로부터 받은 인상이 그만큼 강렬했던 때문일 수도 있고, 또 감정을 진솔하게 드러내기 위해 수사적 기교쯤은 가벼이 넘긴 때문일 수도 있겠다. 기실 따지고 보면 하나는 ‘지금 파산에 내리고 있는 밤비’를, 다른 하나는 ‘지난날 파산에 내렸던 밤비’를 가리키는 것이니 의미상으론 중복이 아니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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