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운동 정권 손에 민주주의가 파괴될 줄이야…”[이진구 논설위원의 對話]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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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우 전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

민경우 전 범민련 사무처장은 “(6·29선언이 있던) 1987년 이후 우리 민주주의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고 믿었는데 조국 사태, 윤석열 검찰총장 찍어내기 등을 거치며 건강성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나는 다시 1987년 6월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민경우 전 범민련 사무처장은 “(6·29선언이 있던) 1987년 이후 우리 민주주의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고 믿었는데 조국 사태, 윤석열 검찰총장 찍어내기 등을 거치며 건강성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나는 다시 1987년 6월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이진구 논설위원
이진구 논설위원
민·주·화.

목이 터져라 외쳤던 그 이름을 30여 년이 지나 다시 외칠 줄 누가 알았을까. 다른 의견을 말하면 처벌하고(5·18민주화운동 역사왜곡 처벌법), 북한 인권을 위해 전단을 날리면 잡아가는(대북전단금지법) 세상. 자신들은 우상화(민주유공자 예우법)하고, 미운 놈은 출마도 막으려는(윤석열 출마금지법) 정권. 민경우 전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55)은 9일 “민주화 운동 출신 정권에서 민주주의가 파괴되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고 말했다.》

―현 정권은 민주화 운동 인사들이 주류인데 왜 비민주적인 모습이 많은 건가.

“우리가 보통 아는 민주주의는 상대를 인정하는 거다. 그래야 대화든, 토론이든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학생 운동 시절 우리에게는 그런 개념이 없었고 배우지도 못했다. 상대는 그냥 적이고 타도의 대상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민주주의를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로 구별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들어왔는데 쉽게 말해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거짓 민주주의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더 완성된 형태의 진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조직을 만들고, 권력을 접수하고, 저항하는 자는 분쇄하라는 방법론까지 들어왔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정말 위험한 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주장과 행동을 민주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기 때문이다.”

―지금 정권이 어떤 점에서 닮았다는 건가.

“상대(윤석열 검찰총장)를 잡더라도 민주적 절차는 지켜야 하는데 지금 보는 대로 그런 게 없지 않나. 문재인 대통령은 형식적 민주주의와 내용적 민주주의를 구분한다. 1980, 90년대 운동권에서 썼던 표현이다. 민주주의를 두 단계로 구분하면, 내용적 민주주의로 가기 위한 어떤 행동도 진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과정으로 정당화된다. 문 대통령과 민주당은 과거 운동권적 행태에 기반을 둔 권력욕으로 사회를 벼랑으로 몰아가고 있다.”

※ 윤 총장 찍어내기의 경우 수사권 없는 법무부가 수색을 지휘했고, 감찰조사가 끝나기도 전에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결과를 발표하고 징계를 청구했다. 감찰 시 의무규정이던 법무부 감찰위원회 자문은 임의규정으로 바꿨다. 이런 부당함에 대한 비판은 검찰개혁을 반대하는 세력의 저항으로 몰고 있다.

―룰이 도움이 안 되면 바꾸거나 없애고, 없으면 만들고 있기는 하다.

“보통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운동권 출신들에게는 넘어선 안 되는 선 같은 심리적 저지선이 없다. 선을 마구 넘나들며 운동했던 습관이 있어서…. 예를 들어 문과대 학생회장은 문과대 학생들의 총의로 뽑혀야 하지 않나.” (당연한 거 아닌가.) “그렇지 않았다. 지도부를 장악하기 위해 선거에 아주 깊숙이 개입했다. 누구를 밀고, 누구를 컷오프 시킬지 등등. 선거를 관리 감독하는 측조차 투표율이 낮아 우리 편이 질 것 같으면 전화를 해서 투표를 시켰다. 유권자 명부를 갖고 있으니 연락처는 물론이고 누가 투표를 했는지, 안 했는지 아니까. 이런 일이 과거 한국대학생총연합회(한총련) 선거에서 무진장 벌어졌다. 우리 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룰도 우습게 여기는 사고방식과 행태들이 그때 집단적으로 만들어진 거다. 그런데 20대 학생 때도 아니고 이제 나이가 들어 국회의원 정도 되고 사회 지도층이 되면 자기의 과거 모습을 바꿔야 하는데 달라지지 않고 똑같다.” (금태섭 전 의원을 징계하고 재심 청구조차 안 받아줘 탈당하게 만들었는데.) “그런 거다. 소속 지자체장이 물의를 빚어 생긴 재·보궐선거에는 후보를 안 내겠다고 당헌에 명기하고도 언제 그랬냐는 듯한 태도.”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때도 정권이 이렇게 과격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2005년 8·15특사로 출소한 민경우 전 사무처장.
2005년 8·15특사로 출소한 민경우 전 사무처장.
“현 정권에서 굉장히 두드러진 모습인데… 학생운동도 제대로 안 한 사람들이 굉장히 과격해졌다. 생전 돌 한 번 안 던져본 친구들이 마치 민족과 정의의 수호자인 것처럼 막 나선다. 데모는 무섭다. 맞는 건 물론이고 잡히면 구속도 되니까. 그러다 보니 제대로 운동을 한 사람들은 데모를 할 때 이리저리 따져보고 신중하게 한다. 앞에서는 돌을 던져도 뒤로는 협상을 한다.” (시위 중에 협상을 한다고?) “학교 측과 경찰의 진입 수위도 논의하고, 단식 농성도 경찰과 적당한 선을 조율한다. 그런데 데모를 뒤나 안전한 곳에서 한 친구들은 쓸데없이 과격하고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경우가 많다. 오늘 투쟁 수위가 정해져 있는데 그런 과격한 주장이 갑자기 세지면 수습이 안 되는 거지. 그래서 운동권 내부에 어떤 불문율이 있냐면… 쓸데없이 과격한 투쟁을 주장하는 애들은 눈여겨봤다가 배제한다. 그런 친구들은 아주 순수할 정도로 바보거나 아니면 프락치다.” (오히려 투쟁을 망치는?) “지금 정권은 과격한 행동을 통제·조율하는 기능이 마비됐다. 배제돼야 할 바보들이 집단화돼서 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집단 전체가 과격해졌다. 더군다나 대통령은 ‘댓글은 양념’이라며 부추겼고…. 제대로 운동을 안 한 친구들이 앞에 나서면 돈도 많이 깨진다.” (돈은 왜?) “시위가 과격해지면 많이 다치니까. 병원비와 변호사비가 많이 든다. 이래저래 도움이 안 된다.”

※ 문 대통령은 2017년 3월 대선후보 경선에서 승리한 후 경쟁 후보에 대한 ‘문파’들의 비방 댓글과 문자폭탄을 “경쟁을 더 흥미롭게 만드는 양념”이라고 했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 만세를 외쳤던 젊음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그 뜨거운 맹세는 어디에 갔나. 민주투사들 손에 파괴되는 민주주의. 지금 입에 문 고깃덩어리 때문이라면… 너무 추하지 않은가.


―현 정권 실세라는 이인영 통일부 장관,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 우상호 민주당 의원 등은 학생운동을 세게 한 편인가.

“평가하기 나름이겠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들이 총학생회장을 한 1987∼89년은 이미 군사정권의 기가 꺾인 때였다. 92년 전국연합 할 때 그 친구들을 봤는데 당시는 김일성이 분단 50주년이 되는 1995년을 통일 원년으로 삼자고 해 운동권 모두가 총궐기를 앞두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지금 민주당 핵심을 차지하는 운동권 출신들은 적당한 지위까지만 하고 다들 이 그룹에서 빠져나갔다.”

※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은 민족민주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했던 1990년대 한국 최대의 재야운동단체다.

―주사파 논란까지 있는데 빠져나갔다고?

“1980, 90년대 학생운동은 거의 다 민족해방(NL)이라고 보면 되고, NL은 혁명이 목표였다. 당시 학생 운동 상층부는 김일성을 수령으로 하고 북한에 흡수 통일되길 바란 사람들이라고 보면 된다. 나도 그랬고.” (군사독재 정권의 조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 내가 주사파였으니까. 그런데 좀 온도 차이는 있다. 옛날 통일혁명당,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처럼 실제로 그런 사상을 신념화한 집단도 있지만 우리 정도는 대학생들의 겉멋으로 보면 된다.” (구별이 되나?) “쉽게 말해 법정 최후진술 때 ‘나는 공산당이 좋아요’를 했는지 안 했는지를 보면 된다. 그 말에 따라 형량이 크게 차이가 나니까. 비전향 장기수들이 그런 사람들이지. 우리 정도는 그렇게 말 못 한다. 그리고 지금 일본과의 마찰도 NL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일본과의 마찰에 NL의 사상적 배경이 있다는 건가.

“혹시 김일성의 ‘갓 끈 전술’을 들어본 적이 있나? 갓은 한쪽 끈만 끊어져도 떨어져 날아간다. NL은 일본을 미국과 한국을 엮는 고리로 보는데 일본을 끊으면 미국도 끊을 수 있다는 전술이다. 내가 2000년 통일운동을 할 때 실제로 그런 논리를 염두에 많이 뒀다. 일본 공격이 반일이 목표가 아니라 반미를 위한 우회 전략인 셈이다. 우리 국민의 반일 정서가 뿌리 깊다 보니 이용하기도 좋고. NL은 이런 걸 이용하는 데 아주 능하다. 그런데 지금 양국 간에 마찰을 빚는 사안 한두 건을 해결한다고 풀릴까?” (윤미향과 정의기억연대의 회계 부정 문제가 터졌을 때 집권세력에서 ‘친일 세력의 최후 공세’라고 했는데 연관이 있나.) “위안부 문제는 여성들의 인권 문제와 민족의 수난, 두 가지 측면이 있다. 그런데 NL은 철저하게 후자다. 그들이 피해 할머니들의 돌봄이 아니라 반일 감정을 증폭시키는 사회운동에 비중을 두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래서 그 운동의 상징인 윤미향을 공격하는 것은 뒤에 뭔가 의도가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지금 좀 흐지부지된 것 같은데 검찰이 윤미향 사태를 더 파고들면 난리가 날 거다. 자금 흐름이 아주 불투명하니까….”

민경우는…
학생운동이 하고 싶어 서울대 의대를 자퇴하고 1984년 국사학과에 입학. 1987년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과 10년간 이적단체인 범민련 사무처장을 지냈다. 민족해방(NL)의 핵심 이론가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총 4년여간 복역했고, 이후 민주노동당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저지 운동을 했다. 2012년부터는 운동을 접고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민경우 전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민주화 운동#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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