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해도 꿀잼’이 주는 위로[2030 세상/정성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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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
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
무엇이든 일이 되면 재미없는 걸까? 영상편집이 즐거워 PD가 되었지만 일주일에 2개씩 영상을 찍어 내다 보니 스스로가 기계처럼 느껴졌다. 그나마 재밌는 건 섬네일을 만드는 순간인데 섬네일이란 영상을 대표하는 이미지와 혹할 만한 문구의 조합이다. 주로 디자이너가 만들지만 예산이 부족해 내가 만들고 있다. 사실 외주 업체 PD인 내가 굳이 안 해도 되지만 유튜브 생태계를 잘 모르는 담당자분들이 ‘아무도 클릭하고 싶지 않은’ 섬네일을 만들어 눈물 흘린 경험을 몇 번 하다 보니 내가 하는 게 낫겠다 싶어 직접 하고 있다.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은 내가 해도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요즘 손으로 대충 쓴 듯한 글씨가 유행이기 때문이다. 해외에서는 몇년 전부터 인기를 끌어 늦은 감이 있지만 완성도보다는 분위기로 승부하는 손글씨는 꾸민 듯 안 꾸민 매력이 있다. 그걸 쉽게 구현하려면 아이패드와 애플 펜슬이 있어야 해서 큰맘 먹고 장만했다. 진화된 기술은 실로 대단했다. ‘그림은 절대 내 길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내가 ‘나도 어쩌면…카카오 이모티콘을 만들어 팔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꿈을 꾸게 만들었으니까.

요즘 카카오 이모티콘을 보면 정말 성의 없이 그린 그림이 많다. 발로 그린 것 같은 그림에 사람 열받게 하는 문구, 그런데 사람들이 그걸 또 산다. 웃기니까. 아무 의미도 없고 생각도 없는 게 딱 내 인생 같다는 위안을 주기도 한다. 내 인성도 만만찮은데 한번 도전해볼까 싶어 알아봤더니 32개의 그림을 그려서 제출하면 된단다. 생각보다 할 만하다 싶다가도 이러한 딴짓도 잠깐이다. 먹고살기 바쁘니까.

그러다 코로나19 확산세가 심해졌다. 영원할 것만 같던 바쁜 시절도 멈춰버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집에 갇혀 아이패드로 그림 그리기에 몰두 중이다. 운동과 자기계발, 명상같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일에만 주목하다가 이런 ‘쓸데없는’ 일을 하니 재밌다. 못해도 뭐라 하는 사람 없으니 너무 좋다. 그림을 그리다 보니 이야기가 필요했고, 아무 말이나 지어내니 그럴듯한 거짓말이 되었다. 초등학생 수준의 그림과 인터넷 소설보다 못한 짧은 이야기를 인스타그램에 올리니 친구들이 좋아했다. 나보고 ‘선한 영향력’이란다. 저런 애도 그려서 올리는데 나도 못 그릴게 뭐냐! 하는 희망을 준다고.

창작자들의 자기계발서로 불리는 ‘훔쳐라, 아티스트처럼’의 저자 오스틴 클레온은 ‘당신의 능력이 빛을 보게 하는 가장 현실적인 10가지 방법’ 중 하나로 ‘아마추어가 되는 것’을 제안했다. 아마추어는 잃을 게 없기 때문에 뭐든 시도하고 그 결과도 기꺼이 공유한다. 실수하거나 모자란 실력이 들통 나는 것을 겁내지 않는다. 섹스 피스톨스의 공연을 처음 본 유명 밴드 리더는 이런 말을 했다. “엉망이었어요. 저도 앞으로 튀어나가 그들과 함께 엉망이 되어버리고 싶었어요.” 창작이 일이 되면 지옥이지만 취미가 되면 참 즐거운 것 같다. 너무 잘하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


#아마추어#창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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