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라는 앨범[동아 시론/윤고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19일 03시 00분


41년 인생 동안 열두 곳 집에 거주
열두 권 앨범 가진 것과 같은 의미
사람들은 늘 집에 대해 할 말 많아
집은 사연 품은 채 함께 늙어간다

윤고은 소설가
윤고은 소설가
며칠 전 내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집에 관한 책을 소개하게 됐다. 어떤 방향으로든 집 이야기를 꺼내면 청취자들도 나도 말이 많아진다. 마이크가 잠시 꺼지고 음악이 나가는 사이에 나는 선곡표 위에 무언가를 적어보았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많은 집에 머물렀는지를 헤아렸더니 모두 열한 곳이었다. 3분이 조금 넘는 음악은 금세 흘러갔고 다시 마이크가 켜졌다. 나는 방금 알게 된 사실을 말했다. 내가 41년간 모두 열한 곳의 집을 거쳤다고, 우리가 살았던 집들을 한번 세어보자고. 그리고 청취자의 사연을 하나둘 읽다가 깨달았다. 방금 내가 역사 속에서 집 하나를 누락했다는 사실을. 고의가 아니었으니 얼른 정정했다. 41년간 모두 열두 곳의 집이라고.

그날 방송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또 하나의 집이 떠올랐다. 실수로 쏟은 팝콘 봉지도 아닌데 왜 이리 뒤늦게 주워야 할 집이 많단 말인가. 그런데 막 생각난 그 집을 내 역사에 편입시켜야 할지 말지를 두고 나는 좀 고민해야 했다. 리모델링 공사를 위해 40일간 머물렀던 임시거처였기 때문이다. 단기임대했던 공간을 내가 살았던 집으로 본다면 나는 41년간 모두 열세 곳에서 살아본 사람이 되는 거고, 그 공간을 포함하지 않으면 나는 41년간 모두 열두 곳에서 살아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열셋과 열둘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것에 대해 나는 남편과 상의까지 했다. 정확히 말하면 상의라기보다는 또 다른 수다의 시작이었고 그럴 것임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다. 집이란 수다의 풍성한 재료가 되고 사람들은 늘 집에 대해 할 말이 많다.

“거기선 사진 한 장 찍은 게 없잖아? 그래서 집이란 느낌이 안 드는 건가?” 내가 말하자 그가 거기서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사진 한 장이 또 미처 발견 못 한 팝콘처럼 구석에서 나온 셈이라 나는 얼른 말을 고쳤다. “거기선 사진을 찍은 게 거의 없잖아?” 그러자 그가 말했다. “떠날 시점이 분명해서 그런 거 아닌가? 40일 후에 떠난다, 그게 확실해서?” 우리의 기억 속에 그곳은 집이 아니라 경유지 정도였다. 너무 짧게 머물렀고, 사진으로 남은 것도 별로 없고, 캐리어 몇 개 말고는 가지고 들어간 것이 없으니 정이 든 가구도 없고, 그곳을 떠날 시점을 명확히 알았다는 이유 말고도 중요한 건, 거기 머무는 내내 우리가 다른 집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곳이 임시거처라는 생각을 잊을 필요가 없어서 거기서 늘 리모델링 중인 다른 집에 대해 말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 집은 다른 집 안으로 흡수되고 만다. 마치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한 예열의 시간처럼.

40일이 지난 후 우리는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왔다. 지어진 지 25년 된 집, 내려앉은 천장부터 불필요한 장식물, 문과 창틀까지 모두 철거하고 골조만 남겼던 집이다. 굵은 펜을 들고 가서 원하는 위치에 콘센트와 스위치, 벽등을 그린 기억이 난다. 퇴근 후 밤이 되면 그날 하루치의 공사가 끝난 집에 찾아가 낯선 어둠과 친해지려 했던 기억도 난다. 주말 아침 도배팀이 신나는 음악을 틀어놓고 작업을 하던 기억도, 수많은 선택지 앞에 놓였던 기억도 난다. 뒤 베란다에 있던 호스 끝에 스프레이건을 연결할지 샤워기 헤드를 연결할지 고르는 것도 그런 선택지 중 하나였다. 나는 샤워기 헤드를 골랐고 그건 내게 그다지 중요한 항목이 아니었으나 하마터면 그게 엄청난 변수가 될 뻔했다. 전달 과정에서 내가 말한 샤워기 헤드가 욕실 담당자에게는 거의 샤워부스로 접수된 거였다. 그분이 너무 의아해서 뒤 베란다에 샤워기를 설치하려는 이유가 어떤 거냐고 물어보지 않았다면, 지금 그곳에는 세탁기 대신 샤워부스가 놓여 있을지도 모른다. 커다란 유리창 바로 앞에 말이다. 그랬다면 우디 앨런의 영화 ‘로마 위드 러브’에 나올 법한, 사연 있는 샤워부스가 됐을 것이다. 선택된 풍경과 그렇지 않은 다른 가능성까지 모두 품고 이 집은 나와 함께 늙어가는 중이다.

열두 번째 집에 살고 있다는 것은 열두 권의 앨범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오래전 앨범 속에는 나와 아무런 연고가 없지만 한 앵글 속에 우연히 잡힌 다른 사람들도 보이는데, 요즘엔 그런 것들이 새삼스레 중요한 정보 같다. 내가 모르는 새 스친, 이 사진 속 사람들은 잘 살고 있을까, 그런 게 궁금해지기도 한다. 내 열두 번째 앨범이 어떤 풍경을 담아낼지 나는 모른다. 다만 언젠가 이 앨범을 떠올리며 내가 무궁한 호기심과 안부에 사로잡힐 것임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윤고은 소설가


#거주지#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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