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끝의 시작인가. 요즘 온 미국이 들떠 있다. 14일 새벽, 작은 손마디 크기의 약병들에 드라이아이스를 듬뿍 담은 특수용기가 뉴욕 롱아일랜드의 한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은 곧이어 내외신 언론에 역사적인 기자회견이 열릴 것임을 알렸다.
그날 기자를 태운 우버 기사는 “미국에서 첫 백신을 접종하는 그 병원 아니냐. 정말 오늘은 대단한 날”이라고 외쳤다. 51년 전 달 착륙 소식에 미국인들이 느꼈던 감정이 이와 비슷했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회견장에는 미국의 ‘1호 접종자’인 간호사 샌드라 린지 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기자들에게 “현장에서 많은 아픔과 죽음을 지켜봤다. 나의 접종이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끝내는 시작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다른 의료진도 카메라 앞에서 즉석으로 백신을 맞았다. 접종이 끝날 때마다 주위의 환호성이 쏟아졌다. 다 큰 어른이 주사를 맞는 걸 보고 사람들이 박수를 치는 낯선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병원 대표는 “역사적인 날이다. 그것도 우리 병원이 처음이라니 너무나 좋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미국에선 하루 약 3000명이 코로나로 목숨을 잃는다. 9·11테러 때만큼의 희생자가 매일같이 발생하고 있다. 그러니 미국인들이 지금을 전시 상황이라 생각하는 것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올 5월 시작된 미 정부의 백신 개발 프로젝트에는 ‘워프 스피드(Warp Speed)’라는 별칭이 붙었다. ‘워프’는 공상과학 영화 ‘스타트렉’에서 빛보다 빠르게 날아가는 항법을 말한다. 이 작전의 운영을 책임지는 4성 장군은 전국 각지에 백신을 이송하는 작업을 2차 세계대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비유했다. 한 편의 전쟁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바이러스가 가장 무섭게 확산되는 시기에 백신이 나왔다는 점도 극적이다.
미국은 내년 3월까지 1억 명에게 백신을 접종하고 적어도 6월엔 집단 면역을 이루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코로나 악몽에서 탈출하는 국가가 될 수도 있다. 백신이 ‘게임 체인저’가 되는 것이다. 그동안 바이러스에 가장 큰 피해를 입으며 각국의 조롱거리가 됐던 것을 생각하면 큰 반전이다.
물론 코로나 종식까지는 아직 긴 시간이 남아있고 백신의 안전성에 대한 우려도 여전하지만 현재로서는 고통스러운 터널의 출구를 어느 나라보다 일찍 찾았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지난 주말 미국 주요 일간지에는 마이크 펜스 부통령과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백신을 맞는 사진이 나란히 실렸다.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과 3명의 전직 대통령도 곧 접종할 계획이라고 한다. 평소엔 여야 간에 서로 죽일 듯이 물고 뜯는 미국 정치인들이지만 국가의 명운이 달려 있는 백신 앞에서는 모든 갈등을 덮어두고 결국 하나가 됐다. 이 사태가 나라를 완전히 집어삼킬 수 있다는 위기감, 그리고 백신이 유일한 탈출구가 될 수 있다는 상황 판단을 공유한 덕분이다. 지금 우리가 겪는 백신 사태는 그런 리더십도, 절실함도, 판단력도 없었던 데 따른 대가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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