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아니다’를 외칠 수 있는 용기. 엘 그레코는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부정했던 건 다름 아닌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 미켈란젤로였다. 모두가 천재라고 칭송했던 거장을 그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그림을 어떻게 그리는지 몰랐다”며 무시했다. 스스로를 미켈란젤로보다 뛰어나다고 믿었던 이 화가는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스 화가 엘 그레코가 로마에 왔을 때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는 이미 죽었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여전히 절대적이었다. 젊은 화가들은 거장들의 예술을 답습하기 바빴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추구했던 엘 그레코는 불만스러웠다. 그는 교황에게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에 그린 ‘최후의 심판’ 위에 자신이 더 나은 벽화를 그려보겠다고 제안해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공공의 적이 되어 도망치듯 로마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1577년 스페인 톨레도로 이주한 그는 이곳에서 37년을 살면서 수많은 걸작을 탄생시켰다. 이 그림은 그의 생애 마지막 작품으로, 교회 안 가족 묘비를 장식하기 위해 그렸다. 예수 탄생은 많은 화가가 그렸던 주제지만 그의 그림은 선배 거장들의 것과 달랐다. 좁고 어두운 동굴 안, 아기 예수가 마리아의 무릎을 덮은 하얀 천 위에 누워 있다. 자체 발광하는 예수를 요셉과 세 명의 목동, 황소가 에워싼 채 경배를 하고, 하늘에선 천사들이 축하하고 있다. 압권은 심하게 왜곡된 인체다. 이상미와 비례미를 강조했던 르네상스 그림과 달리, 기괴하게 늘어뜨린 몸은 13등신쯤 되어 보인다. 강렬한 색채, 역동적인 구도, 심하게 왜곡된 인체 표현, 빛과 어둠의 강한 대비 등 엘 그레코 그림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16세기 사람들에게 이런 종교화는 너무도 낯설고 불온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예술적 신념과 독창성은 오히려 20세기 입체파 미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 미켈란젤로보다 성공하진 못했지만, 규범을 깨고자 했던 그의 예술은 무려 400년을 앞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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