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조용하다. 지난달 3일(현지 시간) 미국 대선에서 조 바이든 후보가 당선된 뒤 두 달 가까이 돼 가는데도 북한은 아직 아무런 메시지를 내지 않고 있다. 군 소식통은 “미 대선을 전후해 북한이 눈에 띄는 도발을 하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북한 김정은 지도부는 내년 1월 바이든 행정부가 공식 출범할 때까지 숨죽이며 치밀한 대미 전략 수립에 매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 대선 직전까지만 해도 바이든 당시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면 정권교체 기간인 내년 초까지 북한이 대북정책의 우선순위를 높이기 위해 미국을 겨냥한 도발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외교안보 전문가들이 적지 않았다. 현재 북한의 침묵은 북-미 비핵화 협상 시한을 강조하면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무엇으로 정할지는 미국의 결심에 달렸다”고 도발을 위협하던 지난해 12월 분위기와도 사뭇 다르다.
다만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대선 불복과 재검표 논란으로 혼란스러웠던 미 정국이 점차 안정화되고 바이든 당선인의 취임 시점인 내년 1월 20일이 다가오면서 북한의 대미 메시지나 행동을 시작할 시점이 다가올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현재 김정은 지도부가 직면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경제난, 대북 제재로 인한 3중고를 해결하지 못하면 자칫 정권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 갈수록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다음 달 개최를 예고한 5년 만의 노동당 대회를 기점으로 북한이 대미·대남 행보를 본격화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 “이례적 1월 당 대회, 미 정권교체기 겨냥”
내년 1월은 미국뿐 아니라 북한에도 중요한 ‘정치의 달’이다. 북한은 올해 8월 열린 당 전원회의에서 내년 1월 제8차 당 대회 소집을 발표한 데 이어 이달 초 우리의 국회 격인 최고인민회의를 다음 달 하순 평양에서 개최한다고 예고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당 대회와 최고인민회의 개최 날짜를 1월로 잡은 것은 극히 이례적이라고 보고 있다. 7차 당 대회는 2016년 5월 열렸고 최고인민회의는 보통 4월에 열려 왔다. 게다가 다음 달 8일은 김정은의 생일이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 교수는 “미국의 정권교체 시기가 당 대회 개최 시점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당 대회에서 경제발전계획과 대내외 전략 등 굵직한 정책노선을 과시하고 이어지는 최고인민회의에서 이를 속전속결로 법제화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북한은 8차 당 대회 개최 시기를 “내년 정초”로만 언급하고 구체적 날짜는 아직 공개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당 대회는 김정은의 생일 전후에 개최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많다. 북한이 당 대회 준비를 위해 올해 10월부터 시작한 ‘80일 전투’가 이달 말 마무리된 뒤 수일 내에 당 대회가 열릴 것이 유력하다. 5년 전 7차 당 대회 때는 대회 직전 진행된 ‘70일 전투’가 끝나고 4일 뒤 당 대회가 개최됐다.
북한 관영매체는 당 대회 준비 과정을 보도하고 있지 않지만 북한 내부에서 이미 당 대회에 참석할 지방대표를 선발해 ‘80일 전투’에 대한 총화 작업 등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은 북한 내부 소식통을 인용해 “당 대회 참가자들은 평양으로 출발할 모든 준비를 끝내고 대기 상태에 있다”며 “대표 선발을 마친 뒤 코로나19 검사 등 방역 검열을 마치고 비상연락망을 통해 수시로 건강 상태를 보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최근에는 2016년 7차 당 대회 이후 5년간 김정은의 업적을 과시한 화보집도 발간하는 등 당 대회를 위한 내부 선전을 강화하고 있다.
이와 함께 평양에선 10월 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에 이어 당 대회 또는 김정은 생일을 기념할 것으로 보이는 또 다른 열병식 준비가 이뤄지고 있다. 최근 북한 전문매체 ‘38노스’는 위성사진 분석 결과 평양 김일성 광장 내에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밖에서 볼 수 없는 구조물이 포착됐다고 밝혔다. 10월 대규모 열병식에 참가한 일부 병력들은 열병식이 끝난 뒤에도 평양 인근에 계속 주둔하며 열병식 훈련을 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야간 비행을 했던 전투기들도 지금까지 매일 수차례 이륙해 비행하는 모습이 포착되고 있다고 한다. 한 군 관계자는 “대북제재로 항공유가 부족한 북한은 그간 공군의 전투기 훈련 규모를 줄여왔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동향”이라고 했다.
물론 가장 큰 변수는 코로나19 여파다. 일각에선 열병식 규모가 조정, 축소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된다. 정부 소식통은 “당 대회 역시 초유의 ‘화상회의’로 이뤄질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 당 대회서 김정은식 ‘핵 독트린’ 강조할 듯
현재 북한 내부에선 김정은의 여동생이자 최측근인 김여정 당 제1부부장과 대미 실무 협상을 전담해온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 등이 주축이 돼 향후 대외전략 구상을 세우는 데 주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한미 당국은 김정은이 이번 당 대회에서 바이든 당선인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낼지 주시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당 대회에서 제시한 향후 대외전략 방향에서 김정은의 핵 독트린이 다시 강조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김정은은 2016년 7차 당 대회에서 핵·경제 병진노선을 강조하며 공식석상에서 처음으로 핵보유국 지위를 언급했다. 당시 그는 “핵 무력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 뒤 2017년 11월 “핵 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정부는 아직 바이든 행정부의 구체적인 대북 전략이 드러나지 않은 만큼 북한도 미국과의 대화 가능성을 열어두는 메시지를 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다만 미국과의 대화 재개 조건으로는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 등 기존 입장을 되풀이할 것이 유력하다. 한국에 대해서는 남북 합의 이행을 강조하면서 노골적인 비난은 자제할 것으로 보인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북한이 핵무기를 앞세워 전략적 위상을 높이면서 핵을 평화적으로 이용하고 선제공격하지 않겠다는 자신들의 ‘핵 독트린’을 강조할 것”이라며 “미국을 크게 자극하지 않으면서 대미 협상력을 높일 수 있는 메시지를 고심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고위 간부 출신 탈북자는 “대외전략을 (당 대회에서) 너무 구체적으로 밝히면 북한도 나중에 운신의 폭이 좁아지기 때문에 기본적인 방향성만 제시할 것”이라고 했다.
일각에선 북한이 획기적이고 급진적인 노선 변화를 천명할 수 있단 관측도 나온다. 앞서 김정은이 “혹독한 대내외 정세 지속과 예상치 않았던 도전들”로 경제발전 5개년 전략 달성에 실패했다고 인정한 만큼, 강경한 대외 메시지로 내부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 바이든 행정부와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는 전략을 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 당 대회 이후 3월이 도발의 중대 기로
올해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는 상반기에 집중됐다. 지난해 말부터 이뤄진 다수의 시험발사는 대부분 초대형방사포나 북한판 에이태킴스(ATACMS), 북한판 이스칸데르 등 대남타격 무기의 기술적 테스트를 위한 목적이었다. 이른바 대남타격 ‘3종 세트’라 불리는 이들 무기체계는 10월 대규모 열병식에서 모두 공개됐다. 신종우 한국국방안보포럼 사무국장은 “열병식에서 북한이 과시한 ‘3종 세트’는 사실상 실험을 끝내고 양산 단계에 접어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때문에 앞으로 북한에 남은 선택지는 대륙간발사탄도미사일(ICBM)이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등 대미 겨냥 무기체계의 진전된 기술력을 과시하는 도발이 될 것이라는 분석에 무게가 실린다.
현재 북한은 신포조선소에서 SLBM 3발을 탑재할 수 있는 로미오급 개량형(3000t급) 잠수함 건조를 마무리 짓고 사실상 진수식만 남겨둔 것으로 알려졌다. 동시에 4000∼5000t급으로 추정되는 신형 잠수함 건조도 병행하고 있다. 군 소식통은 “핵탄두 소형화나 다탄두 기술 등 10월에 공개한 초대형 ICBM의 기술적 진보를 과시하는 ‘저강도 도발’은 충분히 이뤄질 수 있다”고 했다.
군 안팎에선 내년 3월 한미 연합훈련 시기가 북한의 군사적 도발의 중대한 기점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비핵화를 위한 외교적 노력을 뒷받침하겠다며 규모를 축소해 시행한 연합훈련의 추세가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이어질지가 북한의 대미, 대남 강경노선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북한의 불확실성에 대비해 우리 정부가 미국과 정확한 대북 인식과 대북정책 방향을 공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코로나19 여파와 경제난으로 인한 내부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도발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만큼 한미가 대북정책에서 엇박자를 내면 안 된다는 것. 박원곤 교수는 “톱다운이든 보텀업이든 비핵화 협상과 북한 인권 문제 등 대북정책에서 한미가 한목소리를 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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