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어서 대학에서 극작을 전공했는데, 강의 시간에 처음 배운 내용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한 내용이었다. “주인공이 이유 없이 바다를 보고 싶어 하는 순간, 100명이 넘는 스태프가 바다로 이동을 해야 하고, 작가가 주인공을 산 정상에 보내는 순간, 역시 100명이 넘는 스태프가 산 정상에 올라가야 한다. 그러니 작가는 함부로 글을 쓰면 안 된다.” “글쓰기 전에 제작비와 현실 가능성도 고려해야 하니, 절대 함부로 쓰지 마라.”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먼저 배웠더니 나도 모르게 위축이 됐고, 스스로 상상력에 한계를 두게 됐다. 그래서 늘 습작으로 써 온 작품들이 다 생활 속 이야기나 집, 회사, 거리만 나오는 밋밋한 드라마들뿐이었다.
드라마에서 재미를 못 느낀 나는 연극으로 눈을 돌렸다. 연극은 텅 빈 무대에 내가 무엇을 상상하든 상상으로 채워 넣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드라마는 내가 보고 싶은 곳이 아닌 카메라가 보여주는 곳만 봐야 했지만 연극은 내가 원하는 곳을 볼 수 있고, 상상력의 한계라는 게 없는 장르였다. 그리고 때론 가장 리얼하고, 때론 가장 말도 안 되는 상상력이 펼쳐질 수 있는 곳, 그래서 연극을 좋아하게 됐다. 연극은 엉뚱한 상상력을 어떻게 표현해야 관객이 쉽게 이해할까를 고민하는 곳이었기에 연극을 하며 내 안의 ‘하지 마라 DNA’를 많이 제거할 수 있었다.
학창 시절에 배운 드라마에 대한 상상력의 한계를 깨준 영화가 있었다. 2007년에 개봉한 심형래 감독의 영화 ‘디 워’다. 7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지만 스토리가 엉성하고 컴퓨터그래픽(CG)이 어색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작품. 그런데 작가 시각에서 보자면 ‘조선에서 죽은 아이가 로스앤젤레스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설정은 정말 기발한 상상력이었다. 만약에 학창 시절에 이런 작품을 시나리오로 썼다면 분명 “말이 되는 소리를 써라. 그리고 무슨 수로 로스앤젤레스에 가서 촬영을 하냐?”는 핀잔을 들었을 게 뻔했다. 물론 어렸을 때 본 ‘E.T’나 ‘에일리언’ 같은 SF영화가 있었고 우리나라에서 만든 ‘우뢰매’나 ‘티라노의 발톱’ 같은 상상력을 초월하는 영화도 있었지만 어린이 영화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디 워’라는 영화가 제작되고 개봉해서 많은 관객들이 봤다는 사실만으로 상상력을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요즘은 기술이 더욱 좋아져서 영화가 아닌 드라마에도 괴물이 수시로 등장하고 작가가 어떤 상상을 하든, 재미만 있다면 모든 장면과 캐릭터를 구현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드라마가 나오고 심지어 우주에서 전쟁을 하는 영화도 나오게 됐다. 나 역시 학창 시절에 배운 ‘하지 말아야 할 것들!’ 트라우마를 깨는 데 20년은 족히 걸린 것 같다.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하지 마라’는 게 너무 많다. 지금은 개인의 자유보다는 국가의 방침에 따라야 할 시기고, 이 어려운 시기를 잘 견뎌내려면 답답해도 ‘하지 마라’는 건 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하지 마라’에 너무 익숙해져서 스스로 자기 검열을 하고, 스스로 능력에 한계를 두는 상황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2021년은 ‘하지 마라’에서 벗어나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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