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을 가다]확진자 재급증에 시민 우려 고조
일부 식당주 “못 살겠다” 시위
보상 심리에 장식용품 매출 급증
새해 소망은 무엇보다 가족 건강
“죽다 살아난 한 해였습니다. 내년은 저를 포함해 모두에게 건강한 한 해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24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타임스스퀘어 광장의 ‘소망의 벽(The Wishing Wall)’. 시민들이 새해 소망을 적는 이곳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걸렸다 가까스로 회복했다는 중년 남성 로버트 코르테스 씨를 만났다. 그는 올봄 뉴욕에서 코로나19가 창궐할 때 감염됐다. 코르테스 씨는 “한 달 정도 끔찍할 만큼 아팠다. 나는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동료 4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토로했다.
브루클린 주민 케일라 씨 역시 “올 한 해는 정말 힘든 해였다. 가족 중 코로나19 고위험군이 있어서 걱정이 많다”며 “가족 건강을 소원으로 적었다”고 밝혔다. 실제 이날 벽에 걸린 소망의 절반 이상이 ‘건강’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 종이 조각은 이달 31일 밤 타임스스퀘어에서 열리는 새해맞이 행사에서 색종이 조각(컨페티)으로 뿌려진다.
뉴욕은 올해 초 한때 미 50개주 중 코로나19 확진자와 사망자가 가장 많았다. 여름부터 환자가 급감해 전염병 대유행(팬데믹) 극복의 사례로 호평을 받았지만 최근 날씨가 추워지면서 확진자가 급증해 우려가 높다. 현재까지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은 뉴욕 시민은 전체 830만 명의 4.8%인 40만 명. 이 중 2만5000명이 숨졌다. 가족, 친구, 동료를 잃은 사람이 워낙 많아 많은 시민이 ‘나도 걸릴 수 있다’는 공포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이 여파로 뉴욕의 연말연시 풍경 또한 대폭 달라졌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관광객, 화려한 퍼레이드, 흥겨운 이벤트, 감미로운 캐럴 등을 찾아볼 수 없다. 각종 행사가 줄줄이 취소됐고 인파가 붐비던 주요 명소에도 적막함만 감돌고 있다.
○ 트리 점등식도 온라인으로
“5분 안에 다 찍으세요. 다음 사람이 기다립니다.”
26일 저녁 기자가 방문한 맨해튼 다운타운의 랜드마크 록펠러센터 앞에는 200m가 넘는 긴 줄이 형성돼 있었다. 이곳에 세워진 대형 크리스마스트리에서 가족사진을 찍으려고 모여든 사람들이다.
20m 이상의 높이를 자랑하는 대형 트리의 위용은 예년과 같지만 올해는 거리 두기를 위해 한 그룹당 5분씩의 사진 촬영 시간만 허용했다.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일정 간격을 두고 그려진 동그란 지점에서 대기해야 한다. 안내 요원들은 “사회적 거리를 준수하고 마스크를 벗지 말라”고 거듭 외쳤다. 이달 초 열린 이 트리의 점등식도 일반인 접근을 제한한 채 TV로만 볼 수 있었다.
인근 성패트릭 성당의 성탄절 자정 미사 역시 대폭 달라졌다. 예년 같으면 미사 시작 1, 2시간 전부터 성당 입장권을 받으려는 수천 명의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올해는 미리 선발된 500명의 신자들만 미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평소 10여 명씩 앉을 수 있는 긴 의자에 한두 명씩 떨어져 앉은 신자들은 코로나19 종식과 세계 평화 등을 기도했다. 성당 측은 참가하지 못하는 신도들을 위해 이날 미사를 온라인으로 생중계했다.
○ 산타 없는 성탄절, 문 닫은 기념품 가게
유명 백화점과 쇼핑몰의 연말 행사 역시 대부분 원격으로 열리고 있다. 이로 인해 성탄절의 상징 ‘산타’도 실종됐다. 과거에는 주요 유통업체의 입구와 로비 등에서 산타 분장을 한 직원이 어린이를 포함한 많은 고객을 맞았지만 감염 우려가 높아지자 이런 행사 자체가 취소된 탓이다. 일부 산타는 화상 앱 ‘줌’으로 어린이 고객과 만나고 있다.
뉴욕의 간판 메이시스 백화점은 1861년 이후 처음으로 오프라인 산타 행사를 취소하고 온라인 행사로 대신했다. 퀸스의 한 쇼핑몰 역시 마스크를 쓴 산타가 사회적 거리를 유지한 채 어린이 손님을 맞았다.
‘아이러브 뉴욕’ 티셔츠 등 뉴욕을 상징하는 굿즈를 판매하는 상당수 기념품 가게는 코로나19 직격탄을 맞고 문을 닫았다. 식당 역시 연말 대목을 놓쳐서 울상이다. 일부 식당 업주들은 15일 타임스스퀘어 광장에서 집회를 열고 실내 영업을 불허한 앤드루 쿠오모 주지사에게 항의했다.
무료 스케이팅을 즐길 수 있어 ‘겨울 명소’로 꼽히는 맨해튼 브라이언트파크도 올해 입장 인원을 제한하고 있다. 간이 노점 ‘홀리데이 숍’ 숫자 역시 줄였다. 연말연시 인기 행사인 브롱크스 뉴욕보태니컬가든의 ‘홀리데이 트레인 쇼’ 역시 올해는 회원에게만 개방하고 있다.
특히 1907년부터 매년 타임스스퀘어에서 열리는 새해 전야 행사 ‘크리스털 볼드롭’은 113년 만에 최초로 무관중으로 진행된다. 매년 1월 1일 코니아일랜드의 추운 겨울바다에 수영복만 입고 맨몸으로 뛰어드는 ‘폴라 베어 플런지’ 행사도 취소됐다.
○ 관광객 없어도 화려하게 장식된 다이커하이츠
일부 시민은 전대미문의 코로나19 사태를 반드시 극복하겠다는 의지와 희망을 드러내며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다. 앞서 이달 18일 저녁 뉴욕시 브루클린 남부의 ‘크리스마스 마을’로 불리는 다이커하이츠를 찾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은 주민들이 형형색색 장식과 불빛으로 자신의 집을 꾸며놓은 동네로 유명하다. 1980년대 한 주민이 장식을 시작한 후 이웃으로 퍼졌고 동네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매년 겨울 약 10만 명의 여행객이 찾아올 정도로 뉴욕의 숨은 명소로 꼽힌다. 대형 관광버스를 대절해 가이드투어를 하는 단체 관광객도 많다.
이날 다이커하이츠는 매우 한산했다. 몰려들던 관광객의 발길이 뚝 끊긴 탓이다. 하지만 많은 주민들은 올해도 변함없이 자신의 집을 예쁘게 장식했다. 혹시라도 찾아올 사람들의 기분을 밝게 해주고 싶다는 의도였다.
집 마당과 계단을 눈부신 장식으로 수놓은 프랭크 맹가노 씨는 기자에게 “매년 장식에 최소 수천 달러의 비용이 들어간다”면서도 “팬데믹으로 유난히 어두운 올 한 해는 특별히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불빛으로 장식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앞으로 더 밝은 미래가 올 것임을 사람들이 믿어줬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 집 장식에 지갑 열어
다이커하이츠 주민처럼 많은 시민들은 화려한 성탄절 실내 장식을 하며 스스로를 격려하고 위로하고 있다.
뉴욕 맨해튼에서 북쪽으로 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벨스 농장’은 크리스마스트리로 사용할 수 있는 살아있는 나무를 잘라서 판매하는 곳이다. 고객이 농장에서 원하는 나무를 고른 뒤 톱으로 베어 자신의 차에 싣고 가는 형식이다. 한 그루당 가격이 보통 60달러(약 6만6000원)여서 많은 시민이 즐겨 찾는다.
올해는 유난히 나무를 찾는 사람이 많아 주인은 이달 8일 “아쉽지만 올해 장사를 끝낸다”는 공지문을 걸었다. 예년보다 매진 시점이 약 2주 빨랐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은 코스트코, 월마트 등 대형마트의 성탄절 장식용품 매출이 예년보다 증가했고 일부는 재고까지 완전히 동났다고 보도했다. 시장조사업체 ‘1010데이터’에 따르면 이미 올해 10월 장식용 조명 판매량이 지난해 10월에 비해 194% 늘었다. 뉴욕타임스(NYT)는 “보통은 11월 말 추수감사절 이후부터 일반 미국 가정의 연말 장식이 시작되는데 올해는 10월로 앞당겨졌다. 사람들이 예년보다 집 장식에 많은 돈과 시간을 쓰고 있다”고 분석했다.
집이나 집 주변에서 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연말 이벤트를 즐기는 사람도 많다. 롱아일랜드시티의 한 아파트에서는 주민이 각자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면 관리사무소에서 어울리는 이웃을 짝지어서 서로 선물을 교환하도록 하는 행사를 열었다. 맨해튼의 한 호화 아파트는 입주민을 위해 로비에서 연말 재즈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뉴요커의 ‘코로나19 블루’는 언제쯤 끝날 수 있을까. 팬데믹의 정확한 종식 시점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시민들의 노력과 의지가 이어진다면 화려한 행사가 수놓는 뉴욕의 예전 풍경은 머지않은 시점에 다시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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