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에 번역·출간된 만화 ‘레코스케’에는 여러 명의 ‘L자’가 등장한다. L자란 ‘판 환자’의 줄임말로서 LP 등 각종 음반을 모으는 데 지나치게 열중하는 지인들에게 내가 짓궂게 지어준 별칭인데 막상 당사자들이 더 즐거워하며 업계에 퍼뜨리고 있다.
‘레코스케’의 주인공은 레코드판에 미친 레코스케 군이다. 그의 친구 ‘레코조우’ 군도 만만찮다. 나중에 등장하는 ‘비틀님’은 말 그대로 비틀스 수집가인데 ‘병세’가 심상찮다.
비틀님은 길을 걷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를 발견하면 그 즉시 6개의 비틀스 노래를 떠올린다. 깃털이 감색이니 ‘Bluebird’와 ‘Blackbird’의 중간쯤이리라 먼저 추정. 굳이 돌을 던져 푸드덕거리게 한 뒤 날개 소리를 감청해 ‘Free as a Bird’보다 ‘Across the Universe’의 새에 더 가깝다고 진단한다. 지저귀자 ‘And Your Bird Can Sing’을, 날아가 버리자 ‘Norwegian Wood(This Bird Has Flown)’을 떠올린다.
#1. 주인공 레코스케 군은 비틀스 멤버 중에서도 조지 해리슨(1943∼2001)의 광팬이다. 어느 날 그는 만약 자는 중에 지진이 나서 음반 수납장이 침대를 덮친다면 맞이하게 될 생의 최후를 상상한다. 생각이 미치자 부산하게 맨 위 칸의 레코드 순서를 뒤바꾼다.
“하마터면 (영국 밴드) ‘베이 시티 롤러스’에 받혀 죽을 뻔했네. 조지 판에 받혀 죽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레코스케의 최종 조치는 조지의 판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박스세트, ‘All Things Must Pass’와 ‘The Concert for Bangladesh’를 맞으면 즉사할 위치에 배치한 것….
#2. 어떤 L자들은 정말 죽기 살기로 모은다. 판을 판다(digging)는 말에 걸맞은, 재빠른 너구리 손이 울버린처럼 음반점에만 가면 돋아난다. 표지를 0.5초 만에 스캔해 내는 매의 눈도 겸비한 이 시대의 진짜 키메라(chimera)들이다. 이 괴상하거나 고상한 열병은 판을 파는(selling) 사람들도 앓고 있다. 제작 과정에서 인쇄가 잘못된 샘플 음반을 악착같이 모아두고, 다른 제작사에서 나온 한정반을 구하기 위해 인맥을 가동한다.
#3. 2020년 국내 음반 판매량이 4000만 장을 돌파했다. 21세기 들어 연간 최대치로 추정된다. 국내에는 안타깝게도 LP만 집계하는 공식 통계가 없지만 이 시장은 더 큰 성장세를 보였을 거라는 게 업계의 추산.
국내에서 LP의 수요는 이제 중고음반에서 새 음반으로, 검은색 일반반에서 컬러반으로 옮겨가고 있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새 앨범은 언제든 유튜브에서 무료로 들을 수 있지만 ‘투명 그레이’ ‘레드’ 컬러 한정 LP가 4만 원대에 팔려도 금세 품절이다. ‘바람이 분다’가 실린 이소라 6집 ‘눈썹달’(2004년)은 지난해 9월 소비자가격 16만7000원짜리 보라색 LP로 재출시되자마자 초 단위로 절판됐다.
#4. 몇 년 전부터 분 LP 붐이 정착하고 더 폭발하게 된 데는 턴테이블 제작사의 발 빠른 움직임도 한몫했다. 김윤중 도프레코드 대표는 “거의 모든 턴테이블 제작사에서 편리성과 품질을 함께 갖춘 새 모델을 앞다퉈 쏟아냈다. 코로나19만 아니었다면 미국에서는 2020년 대규모 턴테이블 박람회가 열렸을 것”이라고 말한다. 호기심에 몇 년 전부터 한두 장씩 LP를 사둔 MZ세대가 마침내 턴테이블을 장만하고 수집에 가속 페달을 밟았을 거라는 게 그의 이야기다.
#5. 업계에 따르면 전 세계에 LP 공장은 70여 곳 존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LP 붐 때문에 올해에만 스무 곳 이상 늘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에서는 상반기에 공장이 1∼3개월간 문을 닫았고 독일 네덜란드 체코 등 전통 강자인 유럽의 생산량은 급감했다. 밀렸던 주문이 하반기에 쏟아지며 세계 LP 시장은 공급 차질까지 빚고 있다고.
#6. 한편에서는 인공지능(AI) 작곡가, 아바타 가수의 히트가 눈앞에 다가왔다. 그들의 히트곡도 언젠가 LP 한정반으로 대량 생산돼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는 날이 올 것이다. 진정한 ‘디지로그’의 신세계, 2020년대가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우리 손목을 잡아끌고 있다. 판에 대한 소유욕은 인류가 지닌 숙명인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을수록 더 만지고 확인하고 싶어 하는 우리 존재가, 아직은, 육신이란 껍데기를 걸치고 있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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