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도발 의존 궁지에 몰린 北
전염병에 체제 혼란 가속화
멀어지는 핵무장-경제재건 목표
소련의 실패한 역사 반복할 텐가
평양에 고독한 군주의 시간이 돌아왔다. 당국가체제의 권력 정점에서 인민통치의 조직 기반을 단단히 추슬러야 할 시간이다. 핵 경제 병진노선을 접고 채택했던 경제건설 집중노선이 자력갱생으로 귀결한 까닭을 밝혀야 할 시간이다. 하노이 노딜 이후 교착상태에 빠진 북-미관계를 정면 돌파할 새로운 외교 셈법을 드러내야 할 시간이다. 조선노동당 제8차 대회 연단을 앞에 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시간은 이렇듯 단한(單寒)하고 지험(至險)하다.
돌이켜보면 북한이 직면했던 지난 5년 동안의 경제난관과 외교곤궁은 하나의 치차(齒車)처럼 맞물려 있었다. 핵무장 고도화를 통해 실존 위협을 감경한다는 병진의 한 축이 경제재건을 통해 인민생활을 향상시킨다는 병진의 다른 한 축을 짓누르는 정책 상극 메커니즘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인민생활을 개선하려면 북한 경제를 국제사회와 연결하는 강도 높은 개방정책으로의 전환을 요구하지만 연이은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 발사는 정반대로 경제 제재의 강도를 높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고도화한 핵무장을 지렛대로 트럼프 대통령의 환심을 촉발시켜 성사시킨 북-미 정상회담에 정치적 승부수를 걸었지만 그토록 원망(願望)했던 경제 제재 해제의 결과를 손에 쥘 수는 없었다. 핵무장 해제와 관련한 명징한 담보 없이는 경제 제재의 부분적 해제조차 어렵다는 사실을 실감해야 했다. 핵무장 정책목표와 경제재건 정책목표가 매섭게 상충하는 병진노선의 병목현상은 제7차 당대회 이래 김 위원장이 뚜렷한 정책성과를 올리지 못하는 연유(緣由)의 구조적 기저(基底)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평양은 자신들이 맞닥뜨린 정책 상극 메커니즘의 구조적 기저에는 손대지 않은 채 수위를 조절한 군사 도발로 국면 반전을 노리는 임시방책에 의존해 왔다. 하노이 노딜 이후 빈번해진 단거리 탄도탄 시험 발사가 대표적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그러한 임시방책의 실행마저도 녹록지 않게 만들었다. 감염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식 입장의 신빙성 여부를 따져 묻지 않더라도 코로나19 팬데믹과 관련한 ‘초(超)민감’ 대응을 보이고 있다. 감염 확산에 대한 그들의 취약한 현실을 상당 부분 반영하고 있다는 진단에 큰 이론이 없어 보인다. 국가의 보건의료 행정능력을 보여주는 2019년도 ‘글로벌 보건지수’는 북한을 100점 만점에 17.5점으로 평가해 195개국 가운데 193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코로나19의 국제 평균 치명률이 2.3%에 그치고 있으나, 보건의료 행정능력 190위 국가인 예멘의 치명률이 27.1%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북한이 감염 확산을 ‘초위험’ 안보 위협으로 인식하고 국경선을 철저히 봉쇄하는 이유를 넉넉히 헤아릴 만하다.
문제는 북한이 코로나19 감염 확산을 체제 생존을 위협하는 안보 문제로 인식하고 국경을 닫아걸고 있는 동안 핵무장 정책목표와 경제재건 정책목표 사이의 병목현상에서 벗어날 국내개혁이나 외교협상의 의미 있는 진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제8차 당대회는 이렇듯 핵무장과 경제재건 사이에 존재하는 정책 상극 메커니즘을 완화해야 하는 지난한 정책과제를 풀어야 하지만 코로나19 감염 확산이라는 실존적 안보 위협이 대내외적 정책 선택의 폭을 지극히 제약하는 조건 속에서 열린다. 연단에 선 김 위원장이 경제건설의 구호로 자력갱생을 반복하고 대미외교 전략으로 정면 돌파를 재탕하더라도 놀랍지 않을 만큼 북한이 맞닥뜨린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열악한 셈이다. 평양의 절대군주가 친필 연하장에 각인한 “어려운 세월 속에서도 우리 당을 믿고 언제나 지지해주신 마음들에 감사를 드린다”는 인민에 대한 축원 인사가 허설(虛說)만은 아닌 사연이다.
공산주의를 향해 달려가던 소비에트 열차가 갑자기 멈췄을 때 소련 지도자들의 반응을 묘사한 러시아인들의 농담은 시사적이다. 스탈린은 열차 승무원을 사살하라고 할 것이며, 흐루쇼프는 열차 뒤에 있는 철로를 해체하여 열차 앞에 설치하라고 할 것이고, 브레즈네프는 승객들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도록 객실 커튼을 내리고 열차를 흔들라고 할 것이며, 고르바초프는 차륜을 바꿔 달지 않은 채 열차를 러시아 철로에서 유럽 철로로 옮기라고 할 것이다. 제8차 당대회 연단에 선 김정은 위원장은 과거 소련의 혁명동지들 가운데 그 누구도 “우리 인민의 ‘리상(理想)’과 염원이 꽃필 새로운 시대”로 가는 철길을 찾지 못했다는 역사를 곱씹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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