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을 가다]1주일간 516명 접종, EU 최저 수준
복잡한 절차, 정부 불신에 접종 꺼려
佛정부 속도전 시사에 야권 반발… 강한 자유주의 전통 일괄 접종에 불리
“걱정을 아예 안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맞아야죠.”
4일(현지 시간) 오후 1시 반.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성당 인근 오텔디외 병원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을 맞으러 온 필리프 씨(52)를 만났다. 파리 시내 요양원에서 일하는 그는 우선접종 대상자다.
이날 병원에는 약 30명이 접종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부는 접종 직전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고, 다른 이는 “백신을 맞아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프랑스보다 먼저 접종을 시작한 영국과 미국 등에서 우선 접종자들이 환한 미소를 보이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유럽연합(EU) 27개국은 지난해 12월 27일부터 미 화이자와 독일 바이오엔테크가 공동 개발한 코로나19 백신의 동시 접종을 시작했다. 하지만 누적 확진자가 약 270만 명인 프랑스의 접종 속도가 유독 더디다. 이달 3일까지 일주일간 프랑스에서는 불과 516명만이 백신을 맞았다. 독일(약 32만 명), 이탈리아(약 18만 명), 스페인(약 14만 명)보다 현격히 낮은 수치다. 여론조사회사 오독사의 지난해 12월 22, 23일 설문에서도 응답자의 58%가 “백신을 맞지 않겠다”고 했다.
필리프 씨에게 왜 ‘많은 프랑스인이 접종을 거부한다고 보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개발 기간이 워낙 짧으니 백신 안전성 우려가 나올 수밖에 없다. 거부한다는 사람을 이해한다”고 답했다.
○ 복잡한 절차와 부족한 인프라
많은 시민이 지적하는 또 다른 이유는 복잡한 절차다. 멜리나 씨(64)는 “주변에도 접종 준비 과정이 길고 복잡하다며 미룬 사례가 많다”고 전했다.
프랑스에서 코로나19 백신을 맞으려면 우선 주치의를 만나 진찰을 받아야 한다. 또 45쪽 분량의 접종 지침서를 읽은 후 접종에 동의해야 한다. 치매 등으로 본인의 판단이 어려운 고령자는 가족 동의까지 필요하다. AFP통신에 따르면 백신 접종 시 이런 절차를 거치는 EU 회원국은 프랑스가 유일하다.
백신 접종을 위해서는 사람이 몰릴 때를 대비해 거리 두기가 가능한 방역 시설, 접종 후 10∼20분간 부작용을 관찰하기 위한 공간 등이 필요하다. 영국 독일 등은 전문센터를 미리 마련한 반면 프랑스는 기존 병원에서 주로 접종이 진행돼 인력 시설 등 인프라가 부족한 편이다. 주사 1대를 맞기 위해 최소 수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일이 잦다 보니 번거로움이 가중된다.
각국에서 백신 주문이 폭증하면서 극소수 제약사가 생산하는 백신이 원활하게 공급되고 있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EU는 화이자 외에도 영국 아스트라제네카, 미국 모더나, 프랑스 사노피, 미국 존슨앤드존슨, 독일 큐어백 등 총 6개사의 백신을 구매하기로 결정했음에도 현재까지 화이자 백신에만 사용 승인을 내려 화이자 백신 공급 속도가 느린 편이다. 현재 미국은 모더나, 영국과 인도 등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에도 사용 승인을 내린 상태다.
○ 보건정책 불신 강해
에마뉘엘 마크롱 정권의 백신 정책이 오락가락한다고 불만을 표하는 사람도 많다.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초 “백신 접종을 의무화하지 않겠다”며 개개인의 의사를 중시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신규 확진자가 급증하자 같은 달 22일 백신 접종 확인증이나 음성 판정 증명서가 있어야만 대중교통 이용이 가능한 일명 ‘백신 강제법’을 도입하려 해 상당한 반발을 불렀다.
프로그래머 그헤그 씨(33)는 “이렇게 정책을 자주 바꾸는 정부를 신뢰할 수 없다. 주사를 맞지 않겠다”고 했다. 일부는 화이자 백신을 맞은 후 이스라엘 등에서 사망자가 나왔다는 점에 우려를 표했다.
특히 많은 프랑스인은 정부가 과거에도 종종 잘못된 보건정책을 집행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정부는 2010년 신종인플루엔자 유행 당시 백신 수천만 개를 주문했다. 하지만 예상보다 환자가 적자 결국 1800만 명분의 백신을 폐기했다. 이에 정부가 대형 제약사의 배만 불려줬다는 비판이 거셌다. 최근 프랑스에서는 정부의 코로나19 방역 실패, 제약사의 백신 임상시험 축소 의혹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홀드업(Hold Up)’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 방역 정책 둘러싼 여야 대립도 심각
프랑스의 느린 접종 속도에 관한 국내외 언론 보도가 쏟아지자 마크롱 대통령은 신년사에서도 “백신 접종 지연은 없을 것”이라며 빠른 접종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주무 장관인 올리비에 베랑 보건장관 역시 5일 “접종 대상을 확대해 다른 이웃 국가의 접종 속도를 조만간 따라잡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를 위해 요양원에 거주하지 않는 75세 이상 노인에게도 백신을 접종하겠다고 밝혔다. 50세 이상 간병인, 소방관, 가사 도우미 등 주로 취약계층을 접촉할 가능성이 큰 사람들에 대한 접종은 이번 주부터 시작됐다. 복잡한 절차 또한 간소화할 뜻을 밝혔다. 베랑 장관은 “백신 접종을 원하는 모든 프랑스인이 간단한 신청만으로 백신을 맞을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며 현재 27개인 백신접종센터를 이달 말까지 500∼600개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백신 접종을 ‘토끼와 거북이 경주’에 비교하며 “결국 거북이가 이기니 신속함과 성급함을 혼동하지 말자”고도 했다.
야권은 백신 미접종자의 대중교통 사용 불허, 백신 접종 속도전 등이 일종의 보건 독재나 다름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대중교통 사용 제한 추진에 대한 반발이 상당하다. 정치 이념이 상당히 다른 각 정당들이 일제히 마크롱 정권 비판에 나선 이유다.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대표는 “전체주의적 조치이자 보건 독재”라고 비판했다. 강경진보 알렉시스 코비에르 의원 역시 “공공 자유를 제한하려면 집단 논의부터 해야 한다”고 했고, 중도우파 공화당의 기욤 펠티어 부대표는 “정부가 의회 통제 없이 우리의 자유를 정지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갖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파리 11구 주민 이리나 씨(40)는 “프랑스인은 옳건 그르건 정부가 무언가를 강요하는 것 자체에 상당한 거부감을 가진다”고 했다. 정부가 프랑스인의 정서와 전통을 무시하고 무조건 속도전만 주장하다간 더 큰 반발에 직면할 수 있다는 의미다.
여론조사회사 IFOP의 지난해 10월 설문조사에서 ‘당장 대선이 치러진다면 마크롱 대통령을 찍겠다’는 응답은 23∼26%였다. 르펜 대표는 24∼27%를 얻어 마크롱 대통령을 조금 앞섰다. 내년 대통령선거에서 재선을 노리는 마크롱 대통령의 고민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마크롱 대통령에게는 ‘방역 정책에 실패해 EU 최고 수준의 확진자가 나왔다’는 이미지가 치명적이다. 그러나 이를 걱정해 자칫 백신 의무화만 앞세우면 보수, 극우 지지자는 물론이고 중도 유권자까지 등을 돌릴 수 있어 일종의 진퇴양난에 빠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탈리아 연정을 구성하고 있는 포퓰리즘 정당 ‘오성운동’ 역시 최근 지지율 하락 때문에 백신을 반대하던 기존 정책을 찬성으로 바꿨다. 유럽 전역에서 백신과 정치를 연계시키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 변이 바이러스 창궐로 재봉쇄 가능성
프랑스 정부는 최근 영국 및 남아프리카공화국발 변이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어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백신을 접종하는 게 국민 안전을 지키는 길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5일 기준 프랑스 내 영국발 변이 바이러스 감염자는 총 15명. 일일 신규 확진자 역시 매일 2만 명 내외를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라 독일과 영국에서처럼 프랑스에서도 조만간 다시 봉쇄가 실시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온다. 르몽드 등은 정부가 20일 해제하려던 식당 영업 금지조치를 다음 달까지 연장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일각에서는 사노피 등 세계적인 유명 제약사를 보유한 프랑스에서 영미권, 독일 제약사만큼의 코로나19 백신 개발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기도 한다. 이 역시 사회 전반의 백신 거부 및 불신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광견병, 탄저병 백신을 만든 ‘면역학의 아버지’ 루이 파스퇴르(1822∼1895)의 나라가 옛말이 됐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