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초, 주요 기업들이 발표한 신년사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절박한 변화’다. 기업들이 경험하는 변화의 폭과 속도는 전에 없이 빠르고 넓어졌다. 의지는 한층 절박해졌다.
변화의 중심에 놓인 단어는 ‘디지털’이다. 디지털 기술은 기업에 기존과 다른 속도를 요구한다. 현대차그룹 임직원들은 수십 년 동안 고품질 자동차 제조만을 목표로 꾸준히 달려왔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사이 회사는 업종과 정체성을 크게 바꿨다.
변화의 가속페달을 밟는 이유는 딱 하나, 생존을 위해서다. 우버와 테슬라의 성장 속도를 목격한 현대차그룹이 과거 페이스를 그대로 유지한다면 낙오될 것이라는 결론은 뻔하다.
연초부터 대형 인수합병(M&A)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속도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절박감 때문이다.
LG전자는 7일 미국 데이터 분석업체 알폰소를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TV에 소프트웨어를 입혀 ‘똑똑한 TV’를 만들기 위해서다. 지난해 말 전기차 부품업체 마그나와 합작사 설립을 발표한 지 2주 만의 일이다. SK도 7일 수소 차량용 연료전지 등 기술을 갖춘 미국 플러그파워에 1조6000억 원을 투자해 최대 주주로 올라섰다.
의사 결정 속도도 상상 이상으로 빨라졌다. 현대차는 최근 몇 년 사이 부회장 수를 많이 줄였다. 보고 단계 수가 줄면서 회장 직보 체제가 갖춰졌다. 정의선 회장은 “훌륭한 직원을 보고서 만드는 데 활용하는 리더는 필요 없다”고 선언했다. SK하이닉스는 코로나19 와중에도 화상회의를 거듭하며 인텔과 낸드 사업부문 인수 협상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변화의 폭은 기업 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신성장사업인 시스템반도체를 세계 1등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새해 일성으로 내놓았다. ‘1등 삼성’은 익숙한 구호지만 방법이 달라졌다. 상생 생태계 구축을 통해 신성장사업을 키우겠다는 것이다. 삼성의 새로운 혁신 전략의 범위는 삼성전자뿐 아니라 협력업체 전체를 포괄한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사회와 공감하면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기업가정신을 새해 첫날부터 강조했다. 주주와 임직원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이해관계자로 생각하고 사업을 벌이겠다는 것이다.
주요 사업의 디지털 전환과 경영리더 세대교체 시기가 맞물리면서 더욱 크고 빠른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동아일보는 1월 4일부터 주요 기업들의 세대교체와 디지털 전환, 경영 혁신을 주제로 ‘재계 세대교체, 디지털 총수시대’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다.
급변의 시대에는 어두운 면도 있다. 변화에 적응한 기업은 퀀텀 점프를 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곳은 뒤처진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K자형 양극화’가 기업들 사이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얘기다.
기업의 도태는 국가 경쟁력에도 영향을 미친다. 코로나19 위기 극복의 체인지 메이커로 꼽히는 백신 확보 과정에서 우리 기업들은 보이지 않게 기여했다. 해외 백신업체와의 협상을 도왔고, 우리 정부는 기업의 생산 능력을 협상 카드로 사용할 수 있었다. 기업 경쟁력이 곧 국가 경쟁력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급변의 시대, 변화에 뒤처지는 기업들을 걱정하는 목소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환경, 사회, 지배구조를 강화하라는 채찍질만 눈에 보일 뿐이다. 명분을 앞세워 기업을 옥죄는 일은 생색내기에 좋지만 낙오 기업이 환경 변화에 적응하도록 섬세한 정책으로 지원하는 것은 빛이 나지 않는 까다로운 길이다. ‘기업 하기 좋은 나라’라는 구호는 사라진 지 오래다. 누군가 꼭 해야 할 그 일은 지금 누가 챙기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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