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입에서 진실의 ‘직격탄’만 쏟아져 나오는 이런 세상은 아름답기보단 거칠고 위험해요. 첫 데이트 신청을 위해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남자에게 여자는 “자위 중이에요. 좀만 기다려요” 하는가 하면, 음주운전 차량을 세운 경찰은 운전자가 백인임을 확인하고는 “다행이네요. 흑인이었다면 총으로 쏴죽일 뻔했어요. 봐줄 테니 뇌물은 5400달러! 코카인 사는 데 돈이 많이 들어요”라고 태연히 지껄이는 게 아닌가 말이에요.
거짓말을 모르니 사실관계만 재구성해 스토리텔링을 해야 하는 작가들은 머리가 터질 노릇. 재능 없는 시나리오 작가 마크는 막 해고됐어요. 아파트 월세 600달러를 못 내고 쫓겨날 신세. 이사비로 쓸 전 재산 300달러를 찾기 위해 은행을 찾아요. 마침 정전이 발생해 전산망이 마비되자 창구 직원이 물어요. “얼마를 찾으시죠?” 순간 “300달러…”라고 답하려는 마크의 뇌가 미친 듯 요동쳐요. 뇌 신경세포인 뉴런에 찌직찌직 불꽃이 튀며 뇌 변이가 일어나요! 이제, 마크는 인류 역사상 첫 거짓말을 탄생시키지요. “600달러요!” 직원이 의심 없이 600달러를 내어주려는 순간, 이게 무슨 청천벽력일까요? 긴급 복구된 전산망에 마크의 잔고 ‘300달러’가 뜬 거예요. 겁에 질린 마크에게 은행 직원은 말하지요. “전산망 오류네요. 여기 600달러요.”
‘거짓말의 발명’(The Invention Of Lying·2009년)이란 제목을 가진 할리우드 코미디 영화는 이렇게 시작해요. 인류 유일의 거짓말 능력을 보유한 마크에겐 이제 떼돈 벌 일만 남았지요. 카지노로 간 그는 슬롯머신 앞에서 매니저에게 뜬금없는 거짓말로 소리쳐요. “잭팟이 터졌는데 돈이 안 나와요!” 매니저는 “기계가 고장 나 죄송하다”며 수백만 달러를 가져다주지요. 뚱뚱하고 작달막한 키에다 뭉툭한 코 탓에 여자들에게 퇴짜만 맞아온 마크는, 이번엔 길 가던 늘씬한 미녀에게 대뜸 다가가요. “관심 없어요. 꺼져요”라며 손사래 치는 미녀에게 마크는 가공할 ‘원천기술’을 구사하지요. “지금 당장 나와 사귀지 않으면 지구가 멸망해요.” 돌연 공포에 질린 미녀는 마크에게 간청해요. “우리, 모텔로 냉큼 가요! 어서!”
홍홍. 이 얼마나 몽매에 그리던 유토피아란 말인지요? 세상에 나 혼자만이 거짓말을 할 수 있다면! 하지만 마크는 이내 거짓말에 염증을 느낀답니다. 세상이 너무 쉬워졌으니까요. 엘리베이터 안에서 루저 중 루저로 꼽히는 이웃 청년의 어두운 얼굴과 마주한 마크는, 이제 거짓말에 ‘순기능’이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돼요. “오늘 저녁에 뭐 할 거야?”라고 묻는 마크에게 이웃 청년은 뜨악한 대답을 해요. “어젯밤 인터넷으로 자살 방법을 찾아봤어. 오늘밤엔 자살할 거야.” 깜짝 놀란 마크는 이런 멋진(?) 거짓말을 처음으로 던져요. “죽지 마. 넌 반드시 성공할 거야. 멋진 여자도 만날 거고 말이야.” 만면에 희색이 되어 자살 계획을 철회한 이웃 청년은 놀랍게도 희망에 부푼 삶을 살기 시작해요.
선한 거짓말은 악한 거짓말보다 중독성이 더 강한가 보아요. 거짓말의 새로운 능력치에 스스로 감동한 마크는 ‘닌자 아미’가 나오고 ‘외계인’이 나오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거짓말을 동원한 시나리오를 써 일약 스타작가로 떠요. 그러곤 결국, 실의에 빠진 사람들을 모아놓고는 이런 위대한 거짓말을 시작하죠. “여러분이 죽고 나면 공허한 세계가 기다리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이 최선을 다해 살면, 사후 여러분은 아름다운 세계로 갈 수 있어요. 하늘에 있는 어떤 사람이 모든 걸 제어하는 그 세상은 고통도 없고 사랑만으로 가득한 곳이지요!” 이때부터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전지전능한 존재를 믿기 시작하고, 졸지에 마크는 ‘하늘에 있는 어떤 사람’과 인류를 이어주는 매개자로 등극한다는 이야기예요.
왜 이렇게 영화 줄거리만 길게 늘어놓느냐고요? 내용이 재미있어서 요즘 코로나19로 실의에 빠진 독자 여러분께 조금이나마 웃음을 찾아드리려고요, 라고 말하면 거짓말이고요. 그냥 칼럼 한 회 날로 먹으려는 거예요. 하지만, 어때요? 얼토당토않은 B급 코미디인 줄로만 알았던 이 영화엔 의외로 도발적인 통찰이 숨어 있지요? 어쩌면 사람들이 착하게 살도록 마음먹게 하는 세상의 수많은 믿음과 신념도 인류 최초의 거짓말에서 출발한 것은 아닐까 말이지요.
순간 저는 유발 하라리의 베스트셀러 ‘사피엔스’를 퍼뜩 떠올렸어요. 하라리는 주장했지요.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호모 에렉투스는 멸종했지만 호모 사피엔스만이 살아남아 지구를 지배한 이유는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이것을 믿게 만드는 능력에 있었다고요. 허구 덕분에 인간은 성경의 창세기, 현대 국가의 민족주의 신화 같은 공통의 신화들을 짜낼 수 있었고, 그런 공통의 신화를 믿으며 사피엔스들은 국가와 기업, 사회질서에 복속하고 지배계급이 만들어낸 착취 시스템에 순응하게 된다고 말이지요.
어때요? 거짓말이 북한의 핵폭탄보다 100만 배 더 무시무시한 위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아시겠지요? 물론 입만 열면 거짓말을 게거품처럼 뿜어내다 이젠 거짓말인지 진실인지조차 스스로 헷갈리는 위정자들이 ‘정의’로 취급되는 요즘같이 저렴한 세상에선 ‘참말의 발명(The Invention Of Telling Truth)’ 같은 영화가 한결 신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봐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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