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8차 노동당 대회가 이어지던 지난주 군 고위관계자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당 대회에서 핵 무력 증강을 천명하며 한반도 안보 불안을 높이는 와중임에도 정부 내에선 군이 대북 유화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해야 한다는 강한 기류가 있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남북 대화가 얼마나 꽉 막혀 있으면 군에까지 이런 역할을 요구하겠느냐”고 토로했다.
여러 정부 관계자들의 말들을 종합해 보면 장장 8일에 걸쳐 진행된 북한 당 대회는 우리 정부의 남북 관계 개선 ‘프로젝트’에 큰 변수가 된 모양새다. 김 위원장은 당 대회 닷새째인 9일 공개된 사업총화(결산) 보고에서 정부의 방역보건 및 인도주의적 협력과 개별 관광에 대해 “비본질적인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김 위원장 말 한마디로 지난해부터 정부가 공들여 온 여러 대북 협력 ‘시그널’이 사실상 허사로 돌아간 셈이다.
그럼에도 문재인 대통령은 11일 신년사에서 북한에 “멈춰 있는 북-미 대화와 남북 대화에서 대전환을 이룰 수 있도록 마지막 노력을 다하겠다. 언제, 어디서든 비대면으로도 대화하자”고 했다. 하지만 이를 현실화할 묘안은 마땅치 않은 상황이다. 이 때문에 군 내부에선 임기 말이 가까워질수록 군도 남북 관계 개선 노력에 기여해야 한다는 청와대의 압박이 심해질 것이라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 한 군 관계자는 “이에 따라 북한에 저자세를 보이는 ‘북한 눈치 보기’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군 당국이 이런 우려를 해소할 만한 의지를 갖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 우려는 당장 3월로 예정된 상반기 한미 연합훈련에서 현실화될 공산이 크다. 문재인 정부가 임기 내(2022년 5월)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을 실현하기 위해선 한국군의 독자 운용 능력을 검증할 만한 규모의 연합훈련을 진행해야 하지만 이 경우 북한이 거세게 반발할 수 있기 때문. 특히 김 위원장은 “미국과의 합동군사연습을 중지해야 한다는 우리의 거듭된 경고를 (남측이) 계속 외면했다”며 연합훈련 중단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그러자 군 당국이 실제 훈련 대신 컴퓨터 시뮬레이션 훈련인 지휘소연습(CPX)으로 현 정부에서 축소된 연합훈련 규모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가닥을 잡고 있다는 분위기마저 감지된다.
이처럼 현 정부 들어 우리 군에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는 ‘북한 눈치 보기’ 문구를 어떻게 봐야 할까. 군은 일부의 ‘트집 잡기’에 불과하다며 발끈해 왔지만 군 내부에서는 ‘눈치 보기’가 엄연한 현실이라고 지적하는 관계자들이 적지 않다. 군은 지난해 두 차례 한미 공중연합훈련(비질런트 에이스)을 하고도 실시 여부조차 공개하지 않았다. 지난해 해양수산부 소속 공무원이 실종됐을 땐 북한을 의식해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에서 조명탄도 쏘지 않고 야간수색을 했다.
이는 대북 대비태세에도 큰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 군은 2019년 창린도 해안포 도발, 지난해 감시초소(GP) 총격 사건 등 사실상 북한이 사문화한 9·19남북군사합의를 ‘나 홀로’ 지켜 왔다. 이에 따라 연간 20억 원에 가까운 혈세를 들여가며 서북도서에 배치된 K9 자주포를 육지로 반출해 훈련하고 있다. 최신 무기인 천무 다연장로켓(MLRS)을 서북도서에 배치해 놓고도 실사격 훈련을 하지 못해 해병대 사수들이 육군의 훈련을 참관만 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지고 있다.
일부 군 관계자들은 “대북 유화책이 정책기조인 상황에서 군 홀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또 “군이 눈치를 보는 건 북한이 아니라 청와대”라는 볼멘소리까지 나온다. 국가 외교안보 정책의 큰 틀에서 관계 부처가 보조를 맞추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저자세의 정도가 심하다”는 말까지 나오는 건 분명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북한이 고사총으로 대북전단 풍선을 쏘자 군이 대응 사격을 실시했던 2014년 10월.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국회 국정감사에서 최윤희 합참의장에게 “청와대 국가안보실에 보고해 지침을 받았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이 발언이 정확히 현 정부가 군을 대하는 시각과 일치한다고 강조한다. 군의 존재 가치와 직결된 문제조차 사사건건 북한의 눈치를 보는 지금의 상황은 분명 북한의 ‘국방력 강화’에 맞설 강한 군을 바라는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분단국가에서 군은 존재 가치를 스스로 증명할 의지가 있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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