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A4용지 없는 文 신년회견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월 21일 01시 09분


386 운동권에 옹립됐던 문 대통령
“윤석열은 문재인 정부 검찰총장”
한마디로 정권교체의 꿈 무너뜨려
포퓰리즘 정치력은 날로 발전한다

김순덕 대기자
김순덕 대기자
대통령에 대해 보통 사람들이 믿고 싶은 신화가 있다. 대통령은 선하고 현명한데 주변에서 눈과 귀를 가려 문제라는 거다. 실세가 누구냐는 의문도 그래서 나온다.

문재인 대통령은 정치를 진심으로 싫어했다는 사람이다. 밥도 혼밥, 인사도 노무현-문재인 청와대 중심의 근친교배, 국민과의 소통도 의전비서관 탁현민이 꾸민 모델하우스에서나 하는 대통령이어서 나는 늘 궁금했다. 참모진이 써준 말씀자료 없이 문 대통령은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지.

18일 신년회견은 A4용지 없는 대통령의 발언을 접할 수 있는 귀한 기회였다. 어떤 질문에도 문 대통령은 막힘없이 답변했다. 전직 대통령 사면 같은 민감한 문제는 “국민의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는 말로 ‘왕관의 무게’를 피해갔다. 부동산 문제에선 세금 폭탄으로 1인 가구가 늘어난 정책 실패도 인정하지 않았다. 무책임하고도 당당한 모습에 대통령이 진짜 일각에서 주장하듯 운동권 세력에 얹혀있는 마리오네트가 아닌가 싶어질 판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노영민 전 대통령비서실장은 최근 인터뷰에서 “참모진이 대통령의 눈을 가린다거나 민심을 왜곡한다는 것은 다 틀린 말”이라며 대통령은 신문도 댓글까지 꼼꼼히 읽는다고 했다.

그 말이 맞는다면 문 대통령은 누구도 흔들지 못하는 신념의 실세라고 볼 수밖에 없다.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을 쓴 슈테판 츠바이크는 “실제 생활이나 정치라는 힘의 영역에선 뛰어난 인물이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일이 드물다”고 간파한 바 있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인간이 결정권을 쥐는 경우가 많다는 거다.

문 대통령이 뛰어난 인물이 아니라는 불경(不敬)의 소리가 아니다. 만만할 줄 알고 1999년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 후임에 옹립된 블라디미르 푸틴이 뜻밖의 정치력으로 장기 집권하듯, 문 대통령도 카리스마의 정치인임을 새롭게 발견했다는 고백이다.

“월성 1호기는 언제 폐쇄하느냐”는 한마디로 장관부터 엘리트 공무원까지 백방으로 뛰게 함으로써 문 대통령은 실세의 참모습을 드러냈다. 작년 한 해를 윤석열 검찰총장 축출 기도로 보내고도 신년회견에서 “윤석열 총장은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이라는 평가로 정치권을 평정하기도 했다. 최재형 감사원장에 대해 “집을 지키라고 했더니 안방까지 차지하려 한다”고 비난한 임종석 전 비서실장과는 비교도 안 될 세련된 정치적 낙인이다. 윤석열이 대선후보로 나오면 정권 교체할 수 있다는 희망을 무너뜨렸을 정도다.

권력비리 의혹 수사팀을 날린 검찰 인사가 ‘추미애의 난(亂)’의 시작이었다. 대통령이 강조하는 인사권을 통한 ‘문민통제’를 법무장관 추미애 독단으로 했을 리 없다. 그가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밀어붙인 윤석열 징계 청구 및 직무 배제 조치도 문 대통령은 침묵으로 승인했었다.

180석 거대 여당의 탄생 역시 문 대통령 ‘30년 절친’을 위해 청와대 참모진이 대거 나선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사건 덕분으로 봐야 한다. 추미애가 공개를 완강히 거부했던 사건 공소장이 보도되자 집권당 핵심 인사들은 “(대통령) 탄핵을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어쩔 수 없이 해야 하지 않겠나”라며 비례 위성정당 창당에 나섰기 때문이다.

대통령 퇴임 후 안전을 위해 온 나라를 뒤집어 놓고도 “감사원 감사나 검찰 수사에 대해 ‘일절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지금까지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고 자부한다”고 답변할 수 있는 사람은 실세이거나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같은 정치적 인간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심지어 문 대통령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원리가 아주 건강하게 작동되고 있다”는 자찬으로 국민을 경악하게 했다.

한때 우리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불렀던 이유는 독재가 지긋지긋했기 때문이었다. 집권세력은 물론 대통령도 법을 지키는 ‘법의 지배’가 민주주의다.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인 줄 알고 말끝마다 ‘국민’을 외치는 포퓰리즘의 큰 문제가 정치적 무책임이다. 반대는 문파의 온라인테러가 무서워 못 하고, 나라가 잘못돼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달님을 떠받드는 국민이 원한다는데 어쩔 것인가.

권력과 이권에 중독된 좌파 운동권 네트워크 집권세력이 문 대통령의 정치력을 키웠는지는 알 수 없다. 서울·부산시장 선거와 내년 대선을 거저먹을 것처럼 기고만장해진 야권이 정신 차려야 할 이유다.

※문재인 대통령 앞에 <모범 답변>이 나오는 모니터 또는 프롬프터가 있더라는 독자 의견이 적지 않다. 청와대에 따르면 기자의 질문을 속기사가 요약해 올린 것일 뿐, 답변이 담긴 것은 아니었다.

김순덕 대기자 yuri@donga.com
#문재인#신년회견#포퓰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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