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의 이어폰 줄은 귀에서부터 늘어뜨려져 주머니 속 워크맨에 연결돼 있었다. 그 하얗고 기묘한 링거는 시뻘겋게 생동하는 생명의 링거액을 중력을 거슬러 꿀렁꿀렁 D의 뇌에 주입하고 있었다. 약동하는 드럼과 절규하는 보컬…. 난생처음 맛보는 전압에 취해 D는 자신을 가둔 벽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Oh I oh I‘m still alive…’(‘Alive’ 중)
그 앨범의 다음 곡은 하필 ‘Why Go’. 정신병원에 자신을 가두고 떠난 모친을 원망하는 ‘Why go home?’의 사자후가 후렴구다. D는 앞에 놓인 벽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학교생활의 최대 금기, 월장이었다.
1#. 20년 전 일을 D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Why go home?’의 가사가 복선이었을까. 다음 날 D는 담임선생님께 ‘왜 (무단으로) 집에 갔냐’는 추궁을 받으며 매를 맞았다고 한다. 미국 록 밴드 펄 잼(Pearl Jam)의 ‘Ten’(1991년) 앨범이 그날 틴에이저 D에게 끼친 이 이상한 화학반응을, 심신을 리듬에 저당 잡혀 본 적 있는 음악 팬이라면 이해할 수 있으리라.
#2. 1990년대를 풍미한 밴드 펄 잼이 최근 오랜만에 음악 팬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밴드 이름에 소문자 ‘m’을 더해 활동 중인 영국의 트리뷰트(헌정) 밴드, ‘Pearl Jamm’에게 변호사 명의로 경고장을 보낸 것이다. 요는 유사한 팀명 탓에 펄 잼의 이미지에 심대한 타격을 끼치고 있으니 당신들 밴드의 이름을 펄 잼의 노래나 앨범 제목 따위로 바꾸라는 압박이다.
#3. 지구상에는 수많은 트리뷰트 밴드가 활동 중이다. 때로 대중은 잘 몰라줘도 미지의 해저 생물처럼 끈질기게 언더그라운드에서 그들만의 생태계를 조직한다. 호주에는 스웨덴 그룹 ‘아바’의 음악을 재현하는 ‘Bj¨orn Again’이 있다. 아바 멤버 비에른 울바에우스와 부활 메시지를 뒤섞은 작명. 미국에는 호주 밴드 ‘AC/DC’를 흠모하는 ‘AC/Dshe’와 ‘AZ/DZ’가 존재한다. 비틀스의 영광을 기리는 ‘The Buggs’와 ‘The Fab Faux’, 블랙 사바스를 추앙하는 ‘Bat Sabbath’, 듀란듀란의 여성 버전 ‘Joanne Joanne’도 있다. 드레드록스(자메이카 흑인들이 주로 하는 땋은 머리)를 한 채 ‘레드 제플린’을 레게로 재해석하는 ‘드레드 제플린’, 비틀스와 메탈리카의 음악을 창의적으로 융합하는 ‘Beatallica’도 엄존한다.
#4. 펄 잼 변호사의 편지를 받은 ‘Pearl Jamm’ 멤버들은 즉각 반발했다. 원조 펄 잼의 멤버들도 우리의 존재를 진작에 알고 있었으며 우리는 펄 잼의 음악을 존경하고 흠모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데 왜 하필 전염병으로 음악계가 신음하는 시기에, 그것도 변호사 명의로 협박조의 메일을 보냈냐는 것이다. ‘Pearl Jamm’의 페이스북을 살펴보면 실제로 그들이 원조 펄 잼 멤버의 생일, 2집이나 4집의 발매일에 축하 게시물을 올리고 새 앨범이 나오면 홍보까지 해주는 충실한 활동을 꾸준히 해 온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를 노래로 대변하고 상업 거인에 맞서며 활동한 대표적 밴드인 펄 잼에 실망했다. 변호사에게 악역을 맡기지 말고 직접 이야기해 달라. 그러면 물러설 용의가 언제든 있다’고도 덧붙였다.
#5. 우리의 ‘Pearl Jamm’은 얼마 뒤 결국 물러섰다. 팀명을 바꾸기로 한 것이다. 변호사가 시키는 대로 노래나 앨범 제목을 택하지는 않았다. 영세한 트리뷰트 밴드이지만 만만치 않은 강단은 ‘Pearl Jamm’의 새 간판에서 엿볼 수 있다. 밴드는 20일(현지 시간) 페이스북을 통해 새로운 그룹명을 공개했다. ‘LEGAL JAM(합법적 잼)’이다.
#6. ‘Pearl’과 ‘Legal’로 글자 수와 운율은 맞추되 변호사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았으며 ‘합법’이란 항변까지 담은 절묘한 작명이다. 심지어 여덟 글자 모두 대문자로 박았다. 이런 해외 토픽을 서두에 언급한 질주 청년 D에게 전했더니 좋아한다.
“리걸 잼 너무 좋다. 같이 좀 잘 삽시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다. 스타들의 너무 긴 공백은 팬들을 힘들게 한다. 그들 대신 오늘도 무대에 올라 다른 이를 연기하는 지구상의 ‘리걸 잼’ ‘비에른 어게인’ ‘에이시디쉬’ ‘조앤 조앤’들을 응원한다. 단, 타인의 고귀한 법적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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